홍명보가 박주영을 기용하면 인맥이고, 슈틸리케가 이정협을 기용하면 안목인가. 어떤 선수를 선택하느냐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고, 우리는 그 '선택'이 아닌 선택의 '결과'를 두고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선수 기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순간 그만큼 감독의 선택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감독의 선수 기용 권한이 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정협 같은 무명선수가 깜짝 발탁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홍명보와 슈틸리케는 똑같이 본인의 관점에 따라 선수를 선발하고 팀을 만들었다. 다만 홍명보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슈틸리케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감독마다 선호하는 선수를 기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허정무가 이근호를, 조광래가 지동원을, 최강희가 이동국을 아꼈던 걸 그저 인맥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올림픽 메달 감독을 한순간 파렴치한 연고주의자로 만들어버린 건, 뜬금 없이 인맥이란 자극적 워딩을 갖다붙인 기자들도 한몫을 했을테고 그에 놀아나는 냄비근성들도 한몫을 했을테고.

미장센의 극치.


영화에는 여운이 있다. 괜찮은 영화일수록 진한 잔향이 남는다. 속으로 되뇌어도 보고, 어떤 부분을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젖어있기도 하고.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극장과 쇼핑몰, 식당, 마트가 한곳에 어우러져 있는 복합문화공간(멀티플렉스 하나 끼어있다는 게 문화공간이라 불릴만 한지는 모르겠지만)이란 데에선 그것을 느끼기 힘들다. 영화가 끝난 뒤 출구를 나서면 곧바로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소비공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사람들에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심어줬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외적 성장은 앞당겨졌을지 몰라도 사회 정의는 그보다 몇 곱절 퇴보하고 말았다. 정석이 꼼수를 이긴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고, 편법을 모르면 둔하다는 소릴 듣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니 가진 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꼼수와 편법 없이는 부의 축적이 어려운 사회에서 재벌이 되고 갑의 위치에 올랐다는 건 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이와 그것을 평하는 이를 같은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후자가 전자보다는 몇 단계 낮은 급이니까. 건전한 비평도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과 그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다. 하지만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많은 이들이 '너무 쉽게' 코멘트를 남긴다. 요즘 따라 TV에 자주 등장하는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을 할수록 통렬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순전히 나만의 기준으로 그 귀천을 따진다면, 소위 평론가라는 이들은 저기 밑바닥 즈음에 위치해야 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