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한 명이 있다고 하자. 화가가 그림을 그리려면 색을 선택해서 채색해야 한다. 물론 어떤 색을 어떻게 조합할지는 전적으로 화가의 재량에 달려있다. 제3자가 나서서 어떤 색을 골라야할지 대신 선택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화가가 고른 색의 조합이 실망스럽더라도 그건 그림이 완성된 후 결과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화가의 채색 과정에 참견할 것이라면, 아예 화가란 존재를 없애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각자 좋아하는 색을 들고 채색을 하면 될 테니까.

축구도 마찬가지다. 선수를 뽑는데 있어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최우선으로 따지려거든, 아예 감독이란 존재를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mvp 선정처럼 축구 전문가 백 명 모아놓고 포지션별 투표순위로 대표팀 구성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돈을 받고 선수를 기용하는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선수 선발과 운영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있다. 그래야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처럼 본인이 생각하는 팀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팀의 성패는 경기 결과로 따지면 된다. 성과가 있으면 그 팀은 계속 그 감독의 체제로 가는 것이고, 결과가 나쁘다면 다시 새로운 감독이 선임되고. 이게 축구다.

축구에서 감독과 선수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연과 파벌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감독이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자신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선수를 판단하고 팀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히딩크는 박지성을 편애했고, 아드보카트는 이호를 편애했고, 최강희는 이동국을 편애했다. 그런데 이들의 '편애'가 언론의 뭇매를 맞을만큼 그렇게 염치없고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홍명보와 박주영에게만 다른 잣대가 주어지는 걸까.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서? 감독과 선수의 관계는 무슨 문생과 좌주의 관계 같은 게 아니다. 동문 지간이라 뽑아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앞뒤 맥락 모두 생략하고 같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선발했다고 말하는 건 좀 심한 비약이다. 소속팀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런던 올림픽에서 박주영 카드는 한 차례 적중했었고(당시 박주영의 상황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대체재라 할 수 있는 이근호와 김신욱마저 남미 전훈에서 박살난 판국에 박주영의 재발탁이 그렇게 비논리적인 걸까.

박주영을 고대 라인이라서 뽑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과연 축구협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축구협회에 고대 라인 같은 실상은 없다. 축구협회 임원 중 고대 출신이 몇 명인지 구글링이라도 좀 해보고 난 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진정 축구협회 내 파벌을 문제삼고 싶었다면 정몽준이나 정몽규 같은 현대家쪽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축구계 전체로 시야를 옮겨 친축협(허정무, 황보관..)과 비주류(조광래, 차범근 등..)의 갈등을 이야기하던가.

그냥 박주영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편법적인 절차로 병역 문제 해결했던 게 괘씸하고, 명문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도 꼴 보기 싫었다고. 실체도 없는 연줄과 연고주의 들먹거리면서 홍명보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박주영에 대한 이런 반감을 가진 이들이다. 선수에 대한 반감이 최근 대두된 파벌과 연줄에 대한 경각심과 맞물러져 새로운 희생양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쇼트트랙 파벌이나 김연아 은메달 같은 사건들로 감정이 과잉된 상태다. 그러다보니 평소에는 축구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들마저 '파벌'이란 말만 듣고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라는 미디어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대상에 대한 신중한 통찰 없이 특정한 시각만 반복해내는 행태가 심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판단의 오류는 대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일단 그 대상의 본질부터 이해하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반드시.

일본의 우경화에는 고령화, 경기침체 같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 중 전범 처리가 가장 미흡했던 국가였다. 일본 내 무질서를 염려하여 천황이나 실질적 전범들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미국측 기록이 최근 공개된 바와 같이 공산화 위협, 비용적인 문제 탓에 미군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은 지금의 자민당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냉정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자국민들 스스로 무솔리니를 광장에 매달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유럽의 일원이 되었다. 특히 독일은 전범 국가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성숙한 시민 국가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통해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는 아직도 제국주의를 영광의 시기로 추억하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우경화란 흐름도 특정한 이익을 위한 고도의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곪고 있는 내치를 민족주의로 타개하고자 하는 자민당의 고육지계에 가깝다.

문제는 그로 인해 잃을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우경화는 자민당 중심의 내부적 결속이나 집권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에선 벌써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마저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국들의 시선은 싸늘해지고 있다. 일본이란 국가 브랜드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령화와 중첩되면서 일본 사회 자체가 경직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경제는 1류, 정치는 3류'라는 평가대로 일본의 정치계는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 하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을 때 권력을 유지하던 집권 세력이 얼마나 민도와 유리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살인, 폭행, 사기, 마약, 도박, 유괴 등등. 현실에서는 모두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이지만 drama에서는 심심찮게 다루는 소재들이다. 이런 행위가 drama의 소재로 허용되는 이유는 극이라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허구적 사실에 불과하고, 그 소재로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작가의 표현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흡연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상황 설정이나 서사 전개보다도 담배 한 모금이 인물의 심경이나 극적인 상황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담배 연기가 그려내는 미장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진심으로 청소년들의 모방심리를 우려했다면 음주 장면도 검열했어야 했다. 또 성관계, 살인, 폭행 장면들도 모두 검열 대상으로 편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흡연 장면을 편집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일관된 논리라도 갖출 수 있었을 것이고, 논점은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무겁고 심오한 주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흡연만을 검열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에 불과하다. 흡연에 대한 차별, 나아가 흡연자들에 대한 차별. 필자도 담배 연기라면 질색을 하는 비흡연자이고 흡연률이 낮아지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이런 식으로 흡연자들을 규제하고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와 '민생'을 따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일단 두 단어에서 오는 어감상의 차이는 크다. 정치는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고매한 권력 다툼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민생이란 말은 '일반 국민의 생계'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시급한 경제적 문제로 여겨진다. 때문에 정치와 민생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들어 '정치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 '정쟁보다는 민생에 집중하겠다.' 같은 레토릭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정치와 민생은 모두 잡을 수 없고 반드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고루한 정치투쟁은 '덜' 중요한 이차적인 문제가 되고 민생은 '당장' 중요한 시급한 사안이 된다.

하지만 정치와 민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애초부터 정치란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협의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인간이 잉여 생산물을 가지면서부터다.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규칙, 그리고 그 규칙을 유지하는 힘이 수직적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치적 관계가 발생했다. 정치학 개론서에는 정치를 '사회적 제반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이라 뜻한다. 이는 유한한 자원 속에서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고 분배해 나갈 것인지 연구하는 경제학과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정치학과 경제학은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정치경제학(economical politics)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것도 정치경제학(politischen Ökonomie)이지 경제학이 아니었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특히 정치와 민생(경제)을 분리시켜 보고자 했던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먼저 일제의 식민 논리가 그러했다. 식민통치로 인한 정치적 탄압은 불가피했지만 대신 한국의 근대화 시기를 앞당겼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논리다. 뒤이어 집권한 군부정권도 이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논리가 과거사에 대한 책임 회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 시기는 경제의 탈정치화가 전격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경제를 탈정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주로 집권세력의 정당성이 부족했거나 정치 철학이 부재할 때 나타났다.

요즘 회자 되고 있는 '민생법안'이란 말을 살펴봐도 민생이란 의미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민생법안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법안'이므로 정치적 논의나 정쟁과는 상관없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할 당위를 지닌 법안을 의미하는 듯 하다. 하지만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새로운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 가치와 자원을 분배하는 규칙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보조금을 지원하는 신규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법안 때문에 보조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국가의 세금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법적 합의가 '변경'될 뿐이다.

더욱이 국가 자원의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속전속결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생법안'의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시장의 규제 완화가 바로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킬지 혹은 더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지금의 불황이 시장실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공공성의 부재에 따른 것인지는 신중함을 갖고 계속해서 토론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중차한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서의 최소한의 논의도 없이 신속히 통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민생'이란 공허한 선전을 이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경제의 탈정치화를 옹호하는 이런 주장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어디서 경제가 끝나야 하고, 어디가 정치가 시작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경제의 영역에 속하는) 시장은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다. 시장을 지탱하는 모든 소유권과 기타 권리들은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장 역시 정치의 산물인 것이다.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 기원을 갖는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경제적 권리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례들 중에는 아이디어를 소유할 권리,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권리들이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었을 당시에는,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왜 자유 시장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무수한 '경제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제와 정치의 구분선이 옳다는 가정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中

1961년 예루살렘에서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 중 한 명이었다. 태연히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던 경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신이상자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의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사람들에 공개된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한 인간에 불과했다. 수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판정했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는 ‘정상’을 넘어 ‘바람직한’ 성품을 보이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갖고 있었거나 반유대주의 사상에 세뇌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각주:1]

재판의 참관인으로 참석하여 눈 앞에서 아이히만을 접했던 한나 아렌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동시에 무자비한 수백만(600만 명이라고 추산)의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분석은 아이히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성의 완성이 눈 앞에 있다고 여겨졌던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고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언어가 매우 공허하고, 현실 인식에 심각한 괴리를 보이고 있으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분석했다. 아이히만이 나치의 언어 규칙을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를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렀고, 학살은 ‘안락사 제공’, ‘최종해결책’ 등으로 명명했다.[각주:2] 나치 수뇌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가 만든 인공적인 표현을 전국가적으로 통용시켰다.

본래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쟁도 명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공식적인 살인도 이를 정당화해주는 명분이나 구호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방적인 학살은 더욱 그렇다. 2차 대전 말에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치의 언어 규칙은 무자비한 ‘범죄’를 불가피한 ‘의무’로 만들어주었다. 유태인 학살은 체계적인 업무 중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영화 ‘변호인’을 봤다. 보통의 한 대학생을 일순간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간첩으로 만들어버리는 공권력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안당국이나 사법부가 사용하던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안당국이 통용하던 언어 규칙들, ‘국가 전복 세력’, ‘반국가단체’, ‘빨갱이’, ‘간첩’, ‘적화통일’. 유죄를 선고 받았던 당사자들은 실제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지도 않았고 국가 전복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었다. 모두 현실적인 판단 기준과는 거리가 먼 언어들이었다. 영화 속 변호인이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유도 현실과 언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기득권층은 사회의 건전한 비판 세력마저 ‘종북좌파’로 명명한다. 종북세력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동일시 해버리는 사회의 언어 규칙 속에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마저 북의 지령을 받고 온 종북세력의 분열 조장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변호인에게 계란을 투척하던 할아버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종북 척결을 외치는 집회를 하고 계신다. 이들의 언어는 여전히 공허하다.

사실 언어는 현실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에스키모인들의 십수 개가 넘는 눈에 대한 언어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한 현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 사이는 늘 벌어져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극을 인지하고 ‘사유’하는 것이다.[각주:3] 아렌트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만이 악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라 강조했다. 이를 ‘두려운 교훈’이라 했다. 아이히만은 실제로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가 안락사 제공인지 아니면 학살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종국에는 그마저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아이히만이 학살자가 된 것도 80년대 무고한 대학생을 범죄자로 만든 것도 모두 ‘사유’가 결여된 까닭이었다.[각주:4]  사진이라는 것도 대상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표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렌즈나 필터, 필름에 따라 천차만별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보는 세상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현실과 그 대상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 되며,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타자와의 대화 속 언어는 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힘을 담은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을 테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79 [본문으로]
  2.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177 [본문으로]
  3.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이 부림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간극을 알아차리고부터다. 북한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밥집 학생이 빨갱이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공안당국이나 주장이나 사법부의 견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 지를 몸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계기는 주인공을 속물 조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본문으로]
  4.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39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