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대 정치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대통령이 살아온 시대가 그러했다. 무엇보다 정치를 불신한다. 자기는 정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얼마 전 <한겨레21>에 실린 여당 의원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인터뷰 내용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에는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CEO 출신인 그의 머리에 허구헌날 지리한 탁상공론과 세력다툼만 일삼는 '정치'란 영역은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요즘 '잉여인간'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런 정치인들이야말로 그의 눈에는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추구했던 것이 이른바 '실용'이었다. 이념이 어떻고 사상이 어떻고 하는 지긋지긋한 정치판에서 벗어나서 기업처럼 실제 필요되어지는 결과물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끈질기게 대운하 건설을 물고 늘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마인드에서는 대운하와 같이 오로지 '가시적' 결과물을 만들어놓는 것만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그의 마인드는 건설기업 사장 같은 CEO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가 정치에는 관심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정치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으리으리한 국회의사당 건물 속에만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사람만 모여도 그들 사이의 관계, 영향, 질서 등 모든 것들이 '정치'라 불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정치라는 것은 누구든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본질인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이란 직책은 상당히 복잡하고 중요한 국가 정치의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잘' 나라를 다스릴까, 즉 정치를 펼칠까 고민하려들지 않고 단순이 이를 귀찮게 여겨 고개를 저어버린다면 이는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이 스스로가 정치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정작 그가 심혈을 기울이려는 경제나 실용 등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대상들일 뿐 절대 국가 정치에 있어서 목표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한 마디로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일 뿐, 이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과 같다. 물론 경제나 실용 등은 불필요하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치들이지만 이에 앞서 국가지도자는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갖고 보다 높은 수준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정치를 소홀히한다는 것은 정치적 소통의 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상하간의 의사전달, 혹은 이러한 과정 등은 정치의 핵심이다. 의사표현, 의사전달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만이 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정치를 불신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정치의 핵심을 도외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시민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나 노무현 추모 집회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귀를 막아버린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철학이 모든 분야에 있어 근간이 되고 있는 이유는 철학만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심오한 질문들, 예를 들어 옳고 그름, 보다 나은 삶 등에 대한 인간 본연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 덕분이다. 이와 다른 경제, 경영, 기술 따위는 일종의 수단일 뿐 절대 그 자체만으로는 목표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 사유야말로 인간이 최고의 목표로 삼고 지속시켜 나가야 할 가치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철학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고민마저도 없는 것 같다. 오직 그의 머릿 속에는 대운하, 청계천 같은 것들로 가득차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뚜렷했던 자신만의 정치적 철학을 갖고 있었고 또 이를 토대로 그만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확실한 이상을 제시해 줄 줄 알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만의 가치를 정치에 녹이려 애썼다. 비록 당시에는 그 내용이 시대를 앞질러버린 감이 없지 않아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사후에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는 절대 도외시될 대상이 아니다. 국가 지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다. 피곤한 대상이라 고개를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함이 옳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만의 가치와 철학이 담겨있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축구를 종합예술이라 이야기한다. ‘발레+전쟁+체스=축구’라는 말도 있다.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발레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또 우리나라와 일본, 독일과 폴란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 간 자존심을 내건 경기는 마치 전쟁과도 같다고 해서, 그리고 열한 명이 치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체스를 떠올린다고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정말 그렇다. 지단이나 마라도나 같은 선수들이 경기를 한 모습을 보면 축구가 아니라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유연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공을 치고 달리는 광경은 멋있다는 말보다는 우아하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사진에서 배우 뺨치는 미남 축구선수 베컴이 공을 차는 모습은 달력에나 나올 법한 화보 못지않다. 이것저것 설정하고 자세 잡고 나온 작품이 아니다. 그냥 축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관중석 양쪽에서는 대형 국기가 휘날리고, 관중들은 서로에게 야유하고 함성을 지른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잔뜩 상기되어 어깨를 부딪치고 몸을 날려 상대를 막는다. 총성만 없지 전쟁이 따로 없다. 순간 가슴에 태극마크가 박혀있는 유니폼은 참전용사의 군복과 다를 게 없어진다. 한일전이라도 치러지는 날엔 대표 선수들 한 명 한 명은 선수라기보다는 손에 권총이나 도시락 폭탄만을 안 들었다 뿐이지 의사義士에 가깝다. 잉글랜드와 스웨덴의 라이벌전은 가관이다. 축구장에서만큼은 영국신사이고 점잖은 스칸디나비안이고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바이킹의 후예들뿐이다. 서로 욕하고 부르짖으며 자신들이 더 야만스러운 진정한 바이킹의 후예라고 으르렁거릴 뿐이다.


축구에는 지적인 면도 있다. 축구장에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슈트를 입고 경기 내내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턱을 괴고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감독도 있다. 감독들에게 선수들은 체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배치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개인적으로 발레, 전쟁, 체스에다가 ‘드라마’를 추가시키고 싶다. 축구장은 극장이다. 하지만 다른 극들과는 달리 정해진 대본도 결말도 없다. 오로지 선수들과 공만이 라이브로 드라마를 진행시켜나간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관중이 아니라 관객인 셈이다. 때로는 두 시간이 지루하리만큼 재미없고 그저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만, 가끔은 반전영화보다 더 반전을 만들어내며 관객들을 열광시킨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꺾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다. 발레, 전쟁, 체스, 드라마가 합쳐진 종합예술이다.

‘법치주의’ ‘법치국가’...... 법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도 듣지 못했던 말들을 올해 들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 같다. 여름의 촛불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갖가지 시위, 노동운동 할 것 없이 무슨 일만 벌어진다하면 항상 나왔던 이야기가 ‘법과 질서’였다. 우리 사회가 무슨 혼란정국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냥 갑자기 법에 의한 질서가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지는 국가가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다. 국가나 개인의 모든 권리나 의무, 행동 등은 기본적으로 법에 의해 규정된다. 그만큼 법을 존중하는 자세도 굉장히 중요하다. 법을 최우선의 판단 가치로 존중한다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법치주의는 법을 잘 지키라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이건 상식이거든요.” 지난 ‘100분토론‘에서 유시민 전 장관이 했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법치주의에는 국민들이 법을 잘 따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권력자 또한 법에 의거하여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 또한 담겨있다. 하지만 현 정권은 겉으로 법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헌법 등을 무시한 채 임기가 보장되어있는 기관장의 직위를 박탈하는 등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불법적인 시위나 파업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법치주의를 운운하던 정권 스스로가 과연 그만큼 법치주의의 원리를 정확히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뿐이다.

법의 ‘내용’ 자체도 이런 논의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의 법이라 함은 어떤 특정사회의 절대적 이성과도 같은 것이다. 각 국가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각기 조금씩은 다른 법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법이란 모름지기 한 시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이란 자고로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정신을 담고 있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경우 헌법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때론 피를 보면서- 조금씩 때로는 혁명으로 인해 그 내용을 바꾸면서 지금의 내용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제헌절’이란 국경일처럼 1948년 7월 17일, 헌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다. 우리나라에서 헌법은 절대 오랜 기간 끊임없는 국민들의 상호작용과 토론, 역사적 경험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헌법 또는 법질서 그 자체에 대해 절대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단지, 현 정권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헌법이 절대불변의 성질의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무려 60여 년 전 ‘일제히,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의 정신은 현 사회의 가치와 유리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제한적이나마 시민들의 힘으로 개헌을 이루어냈던 87년의 경험처럼 헌법이나 법질서는 시대의 흐름이나 이성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단, 이미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어낸 이상, 그 과정 역시 철저히 법의 질서에 기초하여 진행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엎자는 급진적 사고는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지금의 현 제도권이 마치 법질서와 헌법을 절대불변의 최고의 가치인양 제멋대로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법에 대해 능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법치주의, 법치국가란 말들을 내뱉는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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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란 곳은 정말 흥미롭다.
병원 복도를 지나다가 눈에 들어왔던 '실험동물위령제' 포스터.
하긴, 전에 어떤 진보잡지는 실험동물들의 인권 문제를 커퍼스토리로 심각하게 다루기도 했었다.
불쌍하고 가여운 흰생쥐, 실험돼지 등등
어쨋건, 연말연시에 걸맞는 훈훈한 행사다.

인류 의과학 발전을 위해 희생된 수 없이 많은 실험동물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부디 다음 생애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길......


요즘 들어 말이 부쩍 많아진 국방부. 얼마 전에는 국방부가 '군가산점제' 문제를 꺼냈다. 사라진 군가산점제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역시 여성단체들과 인권위가 쌍수를 들어 반발하고 일어났다.

이처럼 주로 국방부에서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의를 던지기 시작하고, 주로 여성단체에서 이러한 군가산점제에 대해 반발하고 나서는 그림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남녀의 대결구도에서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는 남성에게는 이익이 되고 여성에게는 해가 되는 제도라는 단편적인 인식이 팽배해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절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오로지 남녀 대결이라는 감정 섞인 설전만 오고 갈 뿐이다.

과연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인 것인가? 가장 가까운 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군가산점제가 부활할 경우 크게 불리해지게 된다. '나'와 같이 군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 면제자라든지 혼혈, 외국인, 더 나아가 장애인까지, 이런 사람들은 군가산점제가 시행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게 되는 남성들이다. 만약 이런 남성들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면, 불과 1,2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같은 남성이라 할지라도 군가산점은 엄청난 페널티로 작용될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라기 보다는 '군필자'를 위한 제도이다. 물론 군필자가 남성 중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군가산점제는 군필자를 제외한 남성들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제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필자'로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처럼 군가산점제를 '남성'이 아닌 '군필자'를 위한 제도라고 축소시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주로 여성단체에서 주도했던 남녀 성대립적 구도 하의 논쟁들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군가산점을 단지 '남성'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이 아니라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군필자들 또한 국가에 의한 피해자라 볼 수 있다. 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군복무를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은 거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군복무 기간 동안 받는 불과 몇 만원의 월급 정도? 이십대 초반이라는 학업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가장 중요한 자기 계발의 시기에 짧지 않은 기간 군복무를 수행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평소 그토록 외치고 있는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미 외국의 경우 대부분의 국가가 군가산점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군가산점제가 없는 국가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모병제로 군대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아주 간단한 'give&take' 논리다. 절대 만만치 않은 군복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군가산점,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다고 해서 대다수의 군필자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다. 또 대다수의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공무원 관련 시험 준비를 하는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성단체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자꾸 성대결적인 구도로만 몰고 가며 이를 마치 '여성'에 대한 차별로 바라보게끔 만들고 있다.

난 절대 반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아니, 군가산점제를 이야기하면서 왜 내가 반페미니즘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군가산점제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일부 사람(여성)들의 그릇된 인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군가산점제는 절대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바라볼만한 문제가 아니다. '남성'이 아닌 단지 '군필자'들에 대한 보상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남녀 대결 구도의 감정적인 논쟁이 배제되고,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때 비로소 군가산점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