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관심 가져야 할 게 참 많다.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친구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날씨에도 관심을 가져야 외출할 때 무슨 옷을 입어야하는지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냉장고 속 음식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문단속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무엇보다 외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야 한다. 물론 "나는 외모에 관심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다만 지저분한 매무새에 너더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좋게 볼 사람은 없다.


정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 자신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처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또한 그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뉴스나 신문 혹은 라디오로 정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술자리나 택시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노년의 어르신들이 힘겹게 투표소를 찾는 것은 단지 심심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정치와 '나'는 구분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정치는 우리의 삶 모든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페이지를 보면 분야별로 기사 목록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제, 교육, 스포츠, 연예 등등. 학문의 분과도 마찬가지다. 국문학, 경제학, 정치학, 경영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정치'라는 것이 많은 분야 중 별개의 영역으로 떨어져나와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치는 전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위 분류의 개념이 아니다. 정치란 공간은 사회의 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아우른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국회를 생각하며 정치 뉴스에서 보던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장면을 떠올릴 뿐 정작 그곳이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규율하는 모든 법을 만드는 곳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강남 아파트의 주부들은 선거일에 계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선거일이 쉬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체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온단다. 선거라는 것이 당장 내일의 아파트 값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나자 정부는 KTX 민영화 사업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까닭으로 막바지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장 몇 개월 후부터는 민영화로 비싸진 운임 때문에 KTX 대신 고속버스나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할지 모른다. 또 선거는 당장 내일 사먹을 라면, 과자, 딸기 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환율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치냐에 따라 당장 서민들이 체감하는 물가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각주:1]  이처럼 정치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직결되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이다.


보수논객인 변희재는 후진국일수록 투표율이 높다고 언급했지만 그런 논리는 군주가 누군지 몰라야 나라가 태평성대였다는 고대 은,주나라 때나 통했던 이야기다. 민주주의가 형식상의 요건이라면 그 형식을 채우는 알맹이는 선거권자들의 투표이다. 독일은 그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고도 사상 최악이었던 나치 정권을 맞이했다. 최첨단의 민주주의제를 만들어놓았지만 그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독일 국민들의 정치 참여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선진국의 투표율은 우리나라를 훨씬 앞서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80%에 가까운 투표율을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랑 정치 구조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대통령제와 양강 구도의 의회) 미국 또한 60%를 상회한다. 경제력에 비해 정치 성숙도가 낮기로 유명한 일본 또한 60%가 넘는다. 이같은 비교는 OECD 회원국의 평균 투표율이 70%에 이르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더욱 심각해진다.[각주:2]


"그 밥에 그 나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이유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 지도자는 우리가 선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YS나 DJ 같은 민주화 영웅은 없다. 이제는 선거, 여론, 미디어, 정당이 인물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견제와 갈등을 원동력으로 삼는민주주의 하에서 100%의 지지를 받는 완전무결한 인물이 탄생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누가 선택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인물이 만들어지고 또 몰락하는 것 뿐이다. 일례로 노무현이나 버락 오바마는 대선에서 승리하기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론과 미디어가 그들이 제시하는 신념과 청사진에 관심을 갖고 커다란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비교적 단기간에 넓은 지지층을 형성하며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결국 정치 인물, 지도자를 만드는 건 투표에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바로 '나'이다.

정치 무관심과 혐오증이 많아지길 바라는 정치꾼들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철만 되면 항상 투표율이 낮아서 문제라지만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원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넌덜머리가 나서 더 이상 관심 갖기를 거부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정치와 정치인에 지겨워서 나가 떨어지도록 하는 능력이 탁월할수록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능력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우민들이 많아질수록 정치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간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런 우민들은 부정부패에도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들을 보위할 소수의 극렬지지자들 뿐이다. 이런 우민을 양산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한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형의 정치인은 바로 국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개입하도록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가이다.

- 찰스 스트릭랜드, '정치의 심리학', p.135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지금의 정치인들이다. "꼴 보기 싫다"며 등을 돌리는 순간 그 꼴 보기 싫은 정치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고, "개판이다"며 외면하는 순간 정치판을 더욱 개판으로 만드는 셈이다. 똥은 그냥 피하면 되지만 정치는 혐오할수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 어려운 관심도 아니다. 꼭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정당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수준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하다. 대표성과 정당성을 지닌 정치의 실현, 그리고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는 '나'라는 개인들의 정치 참여도에 달려있다.


  1.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적인 정책을 모토로 고환율 정책을 유지시켜왔다. 대기업들의 수출 실적 위주로 고성장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국내의 물가는 폭등하고 말았다. 물가란 '보이지 않는 세금'과도 같다는 점에서 대기업들의 수출 호황은 서민들의 물가 부담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물론 투표율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나라의 정치 수준 또한 높다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투표율은 80%에 육박하지만 현재 이탈리아의 집권 세력인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외부로부터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는 정권이다. 지배 세력의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잠식 당해 관습적인 투표 행태를 보이는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보여진 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높은 투표율 만큼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성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 아디오스 2012.04.20 00:43 # modify/delete reply

    적극적 정치 참여가 필요하죠...

  • Zoom-in 2012.04.20 00:52 # modify/delete reply

    이번 선거는 달라질줄 알았는데 결과보고 허탈하더군요.
    왜이러는 걸까요?

  • 불탄 2012.04.20 14:20 # modify/delete reply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요즘처럼 절실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공감하며 잘 읽어보았습니다.

  • 기대하라 2012.04.23 22:52 # modify/delete reply

    이번 프랑스 선거에서 투표율이 80%가 넘었다고 하더군요.
    최종 결선에서는 더 높은 투표율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되네요~

    • 독일, 프랑스 같은 유럽대륙계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투표율이 높더군요.
      괜히 선진국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나봅니다.

  • 우슬라 2012.04.24 18:19 # modify/delete reply

    투표율의 상승도 끝까지 붙들어야 할 바람으로 봐야겠지만, 그 보다 먼저 선거에 나오는 많은 후보자들의 자격을 어떻게 분별하느냐도 중요한 요건인 것 같아요. 투표권 행사는 정말 신성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인데, 다만 눈에 많이 들어왔다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정당만 보고 투표하시는 분들도 정말 여럿 봤거든요.
    투표의 양적 상승도 중요하지만, 질적 상승도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ㅎㅎ 그렇게 되면 선거날에 계모임하는 어머님들은 나타나지 않으시겠죠!

    • 아직까지는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나봐요.
      말씀처럼 투표율이 높은 것도 좋지만 그만큼 시민의식 또한 성숙해져야겠죠.

  • scsoo007 2012.10.05 09:59 # modify/delete reply

    일반서민들 중에 정치를 잘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 것같다
    자신이 주변에서 수집한 정보가 정답이 라고 생각하며 열변을 토하고 만족하는...
    자신과 생각이나 이념이 다르면 구석으로 몰고
    정치를 모르면 ...투표율이 낮으면... 이런 이야기는
    하루를 일과 씨름하면 가족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런 말을 할 수있는 이가 정말 부럽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 이유가 일만하는 개미 때문 아닌가 생각하는데..욕만듯네

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 그렇다면 나는 이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어떻게 노트북인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굉장히 쓸데없고 할 일 없어 보이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철학, 아니 현재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이 같은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거창한 '이데아'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논증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흄 같은 짖궂은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노트북 그 자체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시각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노트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이라고 이야기 했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노트북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상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지금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상'이나 '나' 자체보다는 그 둘을 특정한 형식으로 관계짓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와 대상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구조나 체계로, 즉 판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조를 뭉뚱그려 '구조주의'라고 한다. '나'는 '대상'의 참된 속성보다는 '나'와 그 '대상'이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와 위치, 규칙 속에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OK 사인이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는 'ok'와 같은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일본에서는 돈을 의미하고 브라질에서는 모욕을 주는 욕설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모양의 제스쳐라도 각 사회의 약속 체계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언어 존재 '모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사실 앞서 말한 구조주의는 바로 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주의 학자들 중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인 것처럼 우리의 존재 또한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언어 덕분이다. 내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고, 그 노트북이란 사물을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다. 물론 앞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사물을 꼭 '노트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언어적 약속에 의해서는 '사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 의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체계, 규칙임을 의미한다. 내가 타이핑 하고 있는 이 네모난 물건을 '노트북'이라 부르는 것과 '휴대용 컴퓨터'라 부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휴대용 컴퓨터'란 명칭은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노트북'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공책이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듦으로써 공책처럼 마음껏 가방에 넣고 휴대할 수 있는 컴팩트하고 편리한 느낌을 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 명칭에 따라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천지 차이가 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매순간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참신한 이름을 고안하기 위해 그토록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참신한 상품명이 상품의 매출액을 좌지우지 하는 사실은 단어 하나가 본래의 지시 대상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더 마실래?" "More tea?",  차이가 갖고차이


동양에서는 동사 중심의 언어 구조를 갖고 있다. 의식적으로 행위,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에서는 명사가 중요시된다. 같은 동사라 할 지라도 명사의 속성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 따라서 동양과 달리 사물, 독립적인 개체에 중점을 둔다. 동양에는 be동사(독어로는 sein동사, 불어로는 etre동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명사, 주어 중심의 서양 언어체계에서 be동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풍부한 서술어 표현을 갖고 있는 동양적인 언어 구조에 be동사는 굳이 필요가 없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일찍이 동양에서는 행위와 관계에 대한 도덕론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는 인식론, 형이상학 등이 발달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에서 자신을 보는 반면 서양에서는 비교적 독립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동서양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의 차이는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양쪽의 상이한 문화, 관습, 의식을 만들어냈다. 언어는 더 이상 우리 외부에 있는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의 행위, 의식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도 아니고,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영어로 강의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자태다. 더욱이 역사나 국문학 등 과목을 가리지 않고 영어 강의를 독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강의실에는 국문 시를 영어로 배우는 참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얇은 사 고이 접어 나빌레라" 같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것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와 의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작정 우리말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빵에 된장을 발라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대학의 영어 강의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은 물론 그 과정까지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언어는 단순한 수단아니다


영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화라 불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 분명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대학 강의까지 영어로 수업하게 만들 까닭은 없다. 대학은 기업에 양질의 인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학문과 지성의 보고이다. 한국 사회라는 지형 아래 오랜 세월 축적된 학문, 지식, 교양이 이어져오고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곳에서 굳이 '영어교육'에 몰입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몰입'은 영어 수업이나 기업, 외무 등 실무적인 차원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 조비 2011.04.23 22:01 신고 # modify/delete reply

    철학 이야기가 나와서 멈칫했었는데 . . .

    언어의 기원에 의거해 현대의 영어중시사상 풍토를
    잘 꼬집어 주신 것 같네요

    한수 배우고 갑니다 ^^

  • 어멍 2011.04.23 23:57 # modify/delete reply

    왠만한 철학입문서를 읽은 느낌이네요.
    굳이 덧붙일 것이 없는 군더더기 없는 글입니다.

    기술적으론 네이밍이 중요하고 도덕적으론 정명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이 심하게 멀어진 현실, 언어가 심하게 일그러진 지금은 분명 위기의 사회겠지요.
    정치권 뿐 아니라 대학, 학계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겝니다.

  • 커피믹스 2011.04.24 10:43 # modify/delete reply

    미국이 강대국이 아니엇다면 세계통용어는 바뀌었겠죠 ㅎㅎ

  • mark 2011.04.30 16:13 # modify/delete reply

    재미난 내용이네요. ^^ 비가 많이 오는데 내일은 또 최악의 황사라고 하네요. 건강 주의하세요.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 영화는 관객들의 로망이다. 실제 현실세계에서 전쟁은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인간 행위로 일컬여지지만 영화의 스크린 안에서 전쟁은 최고의 오락물이 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말초적인 본능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기관총에서 연발된 총알들은 파편을 튀기고. 인간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있는 파괴적 욕구와 폭력성, 인간에게 있어 전쟁 영화야말로 이 본능적 욕구를 분출시킬 수 있는 시원한 돌파구가 되어준다.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그랬다.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을 내보이며 일당백의 기개로 수백의 베트콩들을 상대하는 '람보'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전쟁 영화다. 적과 아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이런 영화들은 아군의 피는 적군의 피로 갚아주는 원초적인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한 볼거리와 액션신으로 승부를 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이나 진주만(2001), 블랙호크다운(2001) 같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영화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쟁영화에 입혀졌을 뿐, 재현되는 전투의 스케일이나 사실감을 제외한 전반적인 전쟁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이 동원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이 큰 스케일의 전투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진주만은 그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늘로 향했다. 그동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는 재현해내기 어려웠던 공중전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블랙호크다운은 사실감 있는 컴퓨터 그래픽에 감각적인 스타일을 더했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재현되는 현대의 시가전은 기존의 전쟁영화에 '세련됨'를 입혀주었다.

하지만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전쟁 영화는 그 내용과 성격이 180% 달라졌다. 2001년 본토 심장에 행해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들은 큰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테러라는 실체 없는 적과의 전쟁은 미국인들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이, 냉전시대 때는 소련이 그 역할을 착실하게 맡아주던 '적'이라는 존재가 모호하고 애매해진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이라크 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전쟁은 하고 있지만 대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지금까지 미국(혹은 서구 국가들)은 전쟁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응당 해야 할 것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에 대해 고민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경험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청년 병사들의 상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지인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전쟁 영화는 달라졌다. 전쟁이란 것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시작한 미국인들의 혼란은 영화의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졌다. 전처럼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볼거리 영화는 관객과 전문가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대신 전쟁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점차 한계에 부딪혀가는 인간의 나약함, 전쟁의 공포와 잔인함에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젊은 군인들, 끊임없이 전쟁을 필요로 하는 미국 군수산업계의 압력에 대한 자각 등이 전쟁 영화의 내용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의 후속편으로 제작된 드라마 더 퍼시픽(2010)에서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서가 황폐해지다못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자신의 처지와 별다를 것이 없는 일본군을 죽이려면 먼저 그 자신이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쟁광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역자들. 전편과 비교해볼 때 전투신의 분량이나 세밀한 고증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는 다소 부족했으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깊이 있고 심층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해 수리바치산 정상이 성조기를 꼽는 유명한 사진을 다루고 있는 아버지의 깃발(2006) 또한 전쟁으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 대한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전쟁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개인이 국가가 강요하는 대의 안에서 희생당하고 소모되는 현실을 아름답게 미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영웅이 되었던 이들은 자신의 영웅담이 결코 아름답거나 용맹스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을 남겨두고 자신이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 영웅이 된 현실에 힘겨워 한다.

아바타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허트로커(2008)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극도의 공포와 중독성을 다루고 있다. 폭탄물 처리반인 영화의 주인공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제멋대로 영웅 행세를 하며 긴장과 공포를 즐기고 이를 통해 느끼는 희열 같은 것에 중독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쟁은 그의 삶 자체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그를 통해 일그러진 영웅 자신과 이들을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에게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린존(2010)은 보다 직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명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로부터 자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과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 상부의 명령에 의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해매는(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군인들의 '똥개훈련'은 전쟁의 명분을 넘어 과연 어떤 이들이 전쟁을 원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더 이상 영화에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광기 어린 일본, 독일 군인이 아니다. 바로 전쟁 그 자체가 고통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무게감이 전쟁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개봉되고 방영된 전쟁 영화나 전쟁 드라마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아직 분단을 벗어나지 못한 현 상황의 한계였을까. 전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의제기를 시작한 해외의 전쟁물들과는 달리 국내의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전투신의 화려함에 목숨을 걸고 단순한 서사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 센텔 2010.09.21 00:03 신고 # modify/delete reply

    전쟁.. 결국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중 하나겠지요.
    과연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까요? 누구나 참혹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전쟁. 어린아이같은 생각이지만, 서둘러 싸움이 멎기를 소망해 봅니다.

  • 블랙체링 2010.09.22 14:04 # modify/delete reply

    최근 한국에 개봉한 전쟁영화 혹은 전쟁 소재 영화에 대해 조금 빼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다분히 현 정부 친화적인 반공목적의 영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코,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며 인간적 관점에서 전쟁의 모습을 그린 영화는 아마 나오긴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잡아죽여야 할 북한 빨갱이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상당한 알러지 반응으로 보일테니깐요...

    조금 흥분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어멍 2010.09.23 23:02 # modify/delete reply

    본 영화도 있고 아닌 영화도 있고...
    개인적으론 플라툰, 에너미 엣 더 게이트를 추가하고 싶군요.

    예전보단 미국전쟁영화가 고민의 흔적이 있지만 자국을 미화하고 세계경찰, 자유의 수호자라는 포지션에선 한계가 여전한 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ㅎ
    재미있는게 위에 언급하신 모든 영화에 미국이 등장하네요~ㅎㅎ
    역시 미국은 트러블메이커인가요~ㅋ
    혹은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영화 생산성을 보여주는 데 대한 결과인 건가요?ㅎ

    저는 개인적으로 에너미앳더게이트를 정말 재미있게 봤던 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찾아뵈었네요~ 링크 등록하고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ㅎ

혐오감 嫌惡感
[명사]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국어사전에 나오는 '혐오감'의 의미이다. 말뜻처럼 혐오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극대화된 감정.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가식적인 정치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리 안 된 겨드랑이 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생긴 바퀴벌레를 혐오한다. 혐오감이 참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혐오감을 느끼는 대상들을 없애려 하는 것은 과도한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반 세기 전,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에 의해.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견을 길러온 사람들, 혹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고 개고기 식문화를 혐오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복날마다 거리로 나와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인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입니다',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입니다', '개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들을 거리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역시 혐오감일테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가 끔찍하게 잡혀먹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혐오감, 불에 그을린 채 모란시장에 늘어져 있는 식용 개들을 바라볼 때 드는 혐오감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극장 가족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스퀸십을 하는 게이 커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왜 불편해 했을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천륜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인류애적인 죄의식 때문에? 아니다. 단지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남 커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야동을 보려다가 실수로 남성끼리의 성행위가 찍힌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보기에 너무 불편했다. 혐오스러웠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어떤 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성애자들의 동성애가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음 속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천성과 환경이 다른데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인내할 수 없어서 그 혐오감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뿐이다.


  • Heinrich 2010.07.30 02:53 # modify/delete reply

    그러고보니 오늘 복날이라고 애완동물 단체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자면서 프리허그행사를 했던데, 그것이 많이 겹쳐지네요.

    • 그런 사람들이 저에게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광신도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들은 타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요.

  • G_Gatsby 2010.07.31 13:03 # modify/delete reply

    저도 개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물론 동성애도 하지 않습니다.;;
    몇해전에 히스 레저의 영화를 보면서 동성애에 대한 얕은 충격을 받은적이 있었네요. 지금은 많이 완화가 되었지만요.

    • 저 역시도 전에는 동성애에 대한 문화충격이 컸죠.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충격적인 무엇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주변 것들이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놀라고 혐오하는 것은 아닌지,
      오래 전부터 동성애나 개고기가 일반적인 것들이었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일 일도 없었을 테죠.

  • 블랙체링 2010.07.31 13:41 # modify/delete reply

    오랜만의 포스팅이네요 반갑습니다. ^^*

    주사 맞는 걸 무서워하는 무사공포증 환자가 전체 인구의 약30% 정도 차지합니다. 그리고 어떤이들은 그들을 보며 그 나이에 주사도 맞지 못하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죠. 동성애자들 역시 전체인구의 약 20% 정도는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런 나와 다른 사람들은 본인의 기준으로 혐오하고 그것을 대중적 논의로 확대해서 같이 혐오합시다라고 말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 '혐오합시다', 좋은 표현이네요.
      굳이 '합시다'로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을텐데 말이죠.

  • 어멍 2010.07.31 13:54 # modify/delete reply

    인간인 이상 불편함도 혐오감도 자연스런 일이겠지요.
    굳이 억지로, 위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제스춰를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하여서는 안되겠지요. 이왕이면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해를 시도하는 자세면 더욱 좋겠지요.

    (불편함을) 참는다는 관용도 그렇고 '생각하라'는 명제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기 힘든 것도 참고 생각하기 싫은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그 참뜻이 있겠지요.
    맹자왈 공자왈 하였지만 저부터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 그렇게 실천하기 힘든건 비단 어멍님만이 아니겠지요.

      역시 늘 제 생각을 간결하게 정리해주시는 듯 합니다.

  • 2010.08.01 11:08 #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Reignman 2010.08.04 13:05 # modify/delete reply

    개고기도 먹지 않고 동성애자도 아니지만
    그들에 대한 혐오감은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봐요.
    동성애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ㅎㅎ

  • 개고기도 먹어본 적 없고, 동성애는 커녕 연애도 [.....훌쩍] 해 본 적 없습니다만...
    딱히 혐오한달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네요..
    (단정지을 수 없는게, 아직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을거야 라고 믿다가도 보면 또 혐오할지도.....사람 일이 단정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사실 이런 논쟁 자체가 왠지 모르게 이상해보인다는 생각이 드네요...

    먹든지 말든지, 좋아하든지 말든지 개인 취향일 뿐이지 굳이 논쟁할 거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음,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달을 돌든 나랑은 관계 없으니까 신경끌래.'라는, 무한이기주의의 표어를 남기신 셜록홈즈가 생각나는건 왜일까요 =_=;;;;;;

  • 용팔 2010.08.23 06:36 # modify/delete reply

    아주 논리 정연하게 포인트를 지적하여 주시었네요.
    개인마다 또는 문화와 환경에 따라 생각이 틀리고 또는 같기도 한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편향적인 시선 보다는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본인이 싫어 하는것 또는 본인이 좋아하는것을 남에게 강요하는것 만큼은 피해야 할것 같습니다.
    정답이나 해결책을 바라기 보다는 수용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Slimer 2010.08.30 22:33 #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옆 사람도 좋아하게 하고 싶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옆 사람도 싫어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성적인 인내가 필요한 가 봅니다. 최소한 더불어 살려면요..

  • 음.. 2010.10.10 17:04 # modify/delete reply

    잘봤습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이상 똑같이 똑같은행동을하며 똑같은것을 보고 똑같은것을 먹을수없며 똑같은 계속 한 사람만좋아할수없는것처럼 생각이똑같지않은이상 이해가될거라고는 생각치못하겠네요

  • 마루통 2010.10.22 20:00 # modify/delete reply

    글세요,,저같은경우는 그드라마가 나올때마다 딴곳으로 돌린것 같은데여..
    제가볼때 문제는 아직 사고가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관점입니다.
    내 자식이 볼 경우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것두 오버가 아닐까요.?.^^





배가 몹시 고픈 늦은 오후, 지하철 역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삼겹살을 사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고 입속으로는 군침을 삼키며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삼겹살을 기대하며 들떴던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길을 가던 중 마주치게 된 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골목을 다니며 손수 모으셨을 폐박스가 실려 있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계셨다. 헌데, 그 할아버지와 리어카가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저렇게 폐휴지를 모아서 과연 얼마를 버실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삼겹살, 저 할아버지는 이 삼겹살을 드셔본 지 얼마나 오래 되셨을까?"

어머니는 운전을 하고 계셨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려는 도중 무거운 행상을 한껏 짊어진 아주머니 한 분이 무단횡단을 하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급제동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고, 그 아주머니는 무단횡단이 미안했던지 우리 차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양 손에 한가득 든 채 힘겹운 걸음을. 어머니는 뭐 저런 사람이 있냐며 투덜거리며 넘어갔지만, 내 뇌리에는 아직도 그 아주머니의 멋쩍은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한 아주머니.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든 채 분명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그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힘겨운 주름이 가득했다. 같은 또래의 두 아주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음악을 들으며 자가용을 몰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무거운 짐을 든 채 버스를 타려고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니체가 대표적인 안티크리스트로 뽑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가 기독교의 도그마틱한 신의 진리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이런 말을 직접 했던 적은 없었으며 단지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했던 대사의 한 마디였을 뿐이었다(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지만 단순히 안티크리스트 차원에서 보자면). 이처럼 그가 그리스도교를 혐오했던 까닭은 단순히 신이 있고 없고, 기독교적 진리가 맞고 안 맞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싫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말로 '공감'으로도 번역되는 sympathy, 다른 말로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인 연민의 감정을 혐오했다. 연민의 감정이야말로 열등하고 무능하고 뒤쳐지는 대중들이 갖는 패배의식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불교를 비롯한 대개의 종교들이)의 윤리가 이러한 보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다는 의미의 공감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말하는 윤리에는 이 보편적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영웅을 찬양한다. 그가 찬양하는 영웅적 인간 '위버멘쉬'는 대개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 감정에서 벗어나, 아니 보편적 감정을 극복하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은 삶을 쟁취하는 초인이다. 시시한 사람들은 시시하게 고통스러워하지만, 영웅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하게 고통을 감내하며 위대한 수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보편적 감정이 바라는 고통의 부재는 순전히 부정적인 이상이며, 오로지 니체가 예를 들고 있는 알키비아데스,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만이 그 위대한 수난을 감내하는 고귀한 존재들인 셈이다.

어쩌면 니체는 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 고통의 부재를 바라는 건 허무한 일일 뿐이다.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은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이런 고통과 슬픔에 대한 동정심에 불과하다. 니체에게 있어 사랑의 원천은 동정심, 연민의 감정인 셈이다.


개인적 고통에 접근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런데 동정은 고통으로부터 개인적 특성을 제거하기 때문에 동정하는 자는 원수 못지 않게 우리의 의지와 가치를 박탈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을 과시하는 사람은 고통의 필요성 즉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빈곤과 박탈, 위험과 모험, 실수 등의 불운이 그 반대의 사항만큼이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정하는 자들은 불운이 한 존재를 구성하는 경제에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동기와 이유를 얻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 전체를 벗어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개의치 않는 것이다.
-how to read 니체 중-



이처럼 니체는 고통과 불운이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고 말했다. 즉 고통은 그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이자 필요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극복의 과정을 통해 고귀한 열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과 불운 속에 살았던 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인간에게 고통은 단순히 필요였을까? 필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그 고통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열등한 존재로 끝이 났던 것이었을까? 그 인간에게 고통이란 걷어냈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면?

니체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경멸하고, 이 사랑이야말로 동정심으로부터 연유된 나약한 심성이라고 여겼다. 물론 사랑의 원천이 고통에서 비롯된 동정심이라는 니체식의 인식 그 자체도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동정심 혹은 연민의 감정을 니체의 표현 그대로 시시한 사람들의 훌쩍거림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니체의 반대편에 서려면 동정심, 다르게 말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 또한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니체는 나폴레옹 같은 정열적인 영웅들을 노래하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의 영웅들도 많다.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부터 최근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고 법정스님, 혹은 지진의 참사에서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조대원들, 스스로 아프리카 오지를 찾는 열혈 의사들 등.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니체가 추구하는 정열의 삶이 인간사를 수직으로 뻗쳐 가른다면, 예수와 같은 사랑과 동정심의 삶은 모든 인간들을 횡으로 아우른다. 고통의 극복, 이를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진취적인 삶도 물론 고귀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을 가능케 했던 인간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아니었을까. 또 사랑이야말로 니체의 궁극적 목적인 '니힐리즘의 극복'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함께 살아가는 삶에 더 가치를 두는 것,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건 이런 자세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나'만의 성공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나'가 밟고 이겨야할 상대들일 뿐, '경쟁'이라는 번지르르한 말 뒤에 숨겨진 치졸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파편화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삶이 가장 현실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버멘쉬, 초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능과 열등감에서 오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줄 알며 오로지 자신만의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런 사회. 어쩌면 니체의 긍정적 이상은 바로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 영웅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영웅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 G_gatsby 2010.05.27 01:30 # modify/delete reply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고.
    이성이 감성을 조롱하고.
    쥐는 인간을 잡아 먹는게 요즘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느끼는게 많네요.

    • 그러게요 요즘 세상이 참...ㅎㅎ
      그나마 이번 선거 결과가 제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네요.

  • 복돌이^^ 2010.05.27 14:06 # modify/delete reply

    역설적으로 영웅이 없는 사회라~~~~~!!!
    좋은글 잘보고 가요...한참 생각해 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너돌양 2010.05.27 23:52 # modify/delete reply

    아무튼 지후님 참 대단하십니다 전 그냥 수박겉핧기식인데 말이죠. 전 철학이 진짜 약해요 ㅠㅠㅠㅠㅠㅠ

  • 난도광마 2010.05.30 17:47 # modify/delete reply

    U 지후님 역시 박학하시네요 ^^
    S 참고로 대패삼겹살도 맛있답니다 ㅋㅋ
    B 글 잘 읽고 갑니다 ~

  • 밍씨세상 2010.05.30 22:36 # modify/delete reply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공감되는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즐겁게 살겁니다^^

  • 어멍 2010.05.31 00:12 # modify/delete reply

    다재다능하고 하면 된다는 정신력을 요구하는, 슈퍼맨과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지요. 다정도 병이고 연민도 사치인 시대입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김대중 대통령 서거때 그랬지요. 이제 영웅의 시대는 갔다고.
    그가 보기엔 이명박 대통령이 그저 고만고만한 행운아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려^^

    인류역사를 보아도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왔지요.
    하지만 그 인간은 아직 성숙하고 깨어있는 각성한 시민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의 긍정적인 감성과 이성을 넘어선 그 이상의, 그것의 결합인 각성, 깨달음이 필요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저도 폐지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적어도 그런 나라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번은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커를 끄시는 할아버지가 입은 낚시조끼에 벤츠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물론 짝퉁이겠지만 참 아이러니한 풍경입니다.

    생각도, 고민도 저와 유사하신 게 동련상련입니다.

    & 공교롭게도 최근 제 포스팅에 올린 이미지와도 일치하네요.(나폴레옹) 물론 쓰임은 틀리지만^^

    • "적어도 그런 나라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뭔가 짠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적어도..

  • 꽁보리밥 2010.06.05 17:59 # modify/delete reply

    니체의 사상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부분 동감은 합니다
    열심히 준비한만큼 얻는 것이고 연약한 자는 그러한 준비성이
    없으니 어쩜 당연한 대우를 받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입장이 되신 분들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긴 아닐거라 여깁니다.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주신 부모님들 여전히 자식들에게
    다 퍼주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뒤로 하신분들을 보고서 니체가
    어떤 말을 할까요?

    • 아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역시 또 배우게 되었네요!
      감상에 젖다보니 아무래도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하얀잉크 2010.06.07 02:23 # modify/delete reply

    사색하시는 지후아타네호 님이 느껴지네요 ^^ 그나저나 요즘 포스팅이 뜸하시네요

    • 그러게요, 포스팅 꾸준해야 하는데....
      또다시 시험기간이 와버렸네요.
      아마 방학이 되야 다시 포스팅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COCOA 2010.07.29 12:30 # modify/delete reply

    글 잘 읽고 갑니다.
    오늘 아침에 이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글 보고 제 생각도 조금은 정리가 되었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