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말이 부쩍 많아진 국방부. 얼마 전에는 국방부가 '군가산점제' 문제를 꺼냈다. 사라진 군가산점제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역시 여성단체들과 인권위가 쌍수를 들어 반발하고 일어났다. 이렇게 주로 국방부에서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의를 던지기 시작하고, 주로 여성단체에서 이러한 군가산점제에 대해 반발하고 나서는 그림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남녀의 대결구도에서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는 남성에게는 이익이 되고 여성에게는 해가 되는 제도라는 단편적인 인식이 팽배해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절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오로지 남녀 대결이라는 감정 섞인 설전만 오고 갈 뿐이다.

과연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인 것인가? 가장 가까운 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군가산점제가 부활할 경우 크게 불리해지게 된다. '나'와 같이 군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 면제자라든지 혼혈, 외국인, 더 나아가 장애인까지, 이런 사람들은 군가산점제가 시행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게 되는 남성들이다. 만약 이런 남성들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면, 불과 1,2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같은 남성이라 할지라도 군가산점은 엄청난 페널티로 작용될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라기 보다는 '군필자'를 위한 제도이다. 물론 군필자가 남성 중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군가산점제는 군필자를 제외한 남성들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제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필자'로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처럼 군가산점제를 '남성'이 아닌 '군필자'를 위한 제도라고 축소시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주로 여성단체에서 주도했던 남녀 성대립적 구도 하의 논쟁들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군가산점을 단지 '남성'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이 아니라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군필자들 또한 국가에 의한 피해자라 볼 수 있다. 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군복무를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은 거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군복무 기간 동안 받는 불과 몇 만원의 월급 정도? 이십대 초반이라는 학업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가장 중요한 자기 계발의 시기에 짧지 않은 기간 군복무를 수행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평소 그토록 외치고 있는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미 외국의 경우 대부분의 국가가 군가산점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군가산점제가 없는 국가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모병제로 군대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아주 간단한 'give&take' 논리다. 절대 만만치 않은 군복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군가산점,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다고 해서 대다수의 군필자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다. 또 대다수의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공무원 관련 시험 준비를 하는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성단체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자꾸 성대결적인 구도로만 몰고 가며 이를 마치 '여성'에 대한 차별로 바라보게끔 만들고 있다.

난 절대 반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아니, 군가산점제를 이야기하면서 왜 내가 반페미니즘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군가산점제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일부 사람(여성)들의 그릇된 인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군가산점제는 절대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바라볼만한 문제가 아니다. '남성'이 아닌 단지 '군필자'들에 대한 보상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남녀 대결 구도의 감정적인 논쟁이 배제되고,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때 비로소 군가산점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모건 프리먼, 이 할아버지 정말 좋다. 무엇보다 그 흑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가 너무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매력적인 포근한 목소리.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수에 가득 차있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 맞다. 그냥 눈이라고 하기보다는 눈망울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 그 눈망울은 항상 변한다. 푸근한 동네 아저씨의 정겨운 눈망울이 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엄청난 야욕을 부리는 권력자나 악역의 차가운 눈망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그가 정말 그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자신을 연기한 듯 하다. 헐리우드 스타라는 자신에게 우쭐하기도 하고, 자기 집 번호도 잊어버릴만큼 모자라기도 하고, 자신이 입은 티셔츠를 자랑하는 푼수를 보이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배우 모건 프리먼이 아니라 순전한 인간 모건 프리먼이다.

원래 영화를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냥 그저 보는 것 뿐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잔잔해서 좋았고, 잔잔하면서도 희망이라는 것이 보여서 좋았다. 따뜻하다라고 하기에는 말의 뜻이 너무 강한 것 같고, 그렇다고 훈훈하다고 하기에는 또 뭔가 판에 박힌 느낌이다. 그냥 푸근했다.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처럼.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은, 여 주인공으로 나왔던 파즈 베가의 발음. 오래 전에 영화 '프렌치 키스'에서 케빈 클라인이 프랑스 억양으로 영어를 발음하는 것에 인상깊어했던 적이 있었다. 영어보다 한층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프랑스 억양식 영어는 케빈 클라인의 깊은 목소리와 굉장히 잘 버무려졌었다. 이번에도 낯선 영어 발음은 역시 매력적이었다. 파즈 베가의 스페인 억양식 영어 발음은 뭔가 또박또박하면서도 액센트가 강하고 발랄했다. 앙증맞다고 해야 하나.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일수록 영화를 단순히 보는 느낌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영화는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장면과 스토리의 울타리 안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받아들일 뿐이다. 최근 개봉되고 있는 화려하고 빠른 전개의 영화들, 물론 이런 영화들처럼 역동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는 없겠지만 진정 영화를 음미하는 시간, 마음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도 되어보면서 충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갖기엔 너무나 속도감이 넘친다.

반면 책은 다르다. 책은 영화처럼 구체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오히려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책과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툭툭 소스만 던져주고 있을 뿐, 그 소스를 가지고 가슴과 머리로 진정한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보고 있는 것은 깨알 같이 글자가 적힌 흰 종이에 불과하지만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방대하고 재미있는 상상이다.

어렸을 적, 으레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한번쯤은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삼국지에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 내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작은 삼국지 소설책에 불과했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수백만의 대군들과 희대의 장수들이 뿌연 먼지와 거대한 함성을 일으키며 천하의 자웅을 겨루는 장면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렸던 나에게 삼국지라는 책은 황홀한 상상의 삼매경이었다. 그러던 중, 외가댁에 갔다가 외할아버지가 보시던 당시 중국 영화 '삼국지'를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가 상상하던 삼국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드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백만 대군은 온데간데 없고 영화 속에서는 그저 볼품없는 수십의 엑스트라들이 당시의 전쟁을 힘겹게 재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이 영화는 마치 책과 같았다. 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큰 여운이 몰려왔고 요즘 영화랑 다르게 느릿느릿하면서도 낭만적인 장면들은 그 대사들의 여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여운도 그냥 텅빈 공간이 아닌 뭔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의미 넘치는 여운이었다.

사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한 카드 광고에서 카드 이용액을 늘리기 위해 인용했던 좀 유명한 말에 불과한 줄 알았다. 인생을 즐기라는 이 문구는 현란한 조명 아래 춤을 추는 한 젊은 남자와 더불어 인생과 청춘은 즐기기에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춤사위를 보고 있자면 당장 지금이라도 카드를 가지고 흥청망청 생각 없이 내 인생을 즐겨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훨씬 무겁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으라는 말은 그보다는 보다 무겁고 의미있고 진중하다.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라(Make your life extarordinary).'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비로소 완성시켜주는 문구다. '카르페 디엠', 순전히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란 뜻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함, 그것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바로 영화에서의 '카르페 디엠'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 해마다 몇명의 아이비리그 진학 졸업생들을 배출하느냐가 이 학교의 유일한 목표다. 이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연말마다 걸려졌던 명문대학 합격자 명단은 마치 학교의 교육에 대한 슬로건과 마찬가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와 대학 입시가 우선되어졌다. 그 외의 것들, 대학 입시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졌다. 오로지 입시와 공부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입시와 공부만으로 얽매여져야만 했던 학생들 그 하나하나가 그 누구보다도 깊은 감수성과 삶에 대한 열성을 갖고 있을 나이의 소년들이란 점이다. 멋진 시의 한 구절에 꽂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버리는가 하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 아름다운 소녀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기도 한다. 명백한 이유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이끌리는데로 이끌려가는 것 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정은 봄만 되면 흐드러진 벚꽃으로 만개되어졌다. 산 중턱에 자리한 학교였는데 그 산 거의 대부분이 벚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우리는 일년에 한 번 그 아름다운 광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 흐드러진 연분홍 빛의 향연을 보려 시커먼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창문을 향해 턱을 괴고 있었다. 때론 교정으로 나가 떨어진 벚꽃잎들을 쥐고 뿌리며 놀기도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하루종일 입시에 매달리는 건조한 일상을 지내야 했지만 연분홍 벚꽃들을 보면서 설렜던 것, 창문 밖으로 화창한 날씨를 보며 연애시를 쓰고 그 연애시를 적은 종이 테두리를 라이터로 이쁘게 태우며 가슴 졸였던 그 날들.

당시 하루하루 힘들게 공부했던 것은 지금의 나를 또는 앞날의 나를 있게끔 해주는 시간이었고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말그대로 나의 삶을 그리고 미래를 유지시켜주고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 뿐이다. 삶을 지탱해주는 것, 삶의 에너지는 따로 있다.

밤 열시가 되면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났다. 나와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던 친구들과 우르르 도서관에서 밀려나왔다. 도서관은 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늦은 오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던 무거운 발걸음과는 달리 내리막 산길은 매우 가벼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시원한 밤공기와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 어깨동무하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뿌듯함.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입시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육제도를 비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에서 노래하고 있는 낭만과 이상은 영화 속 학교와 사회에 의해 날개가 부러지고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영화가 꼭 현 사회와 영화 속 학교의 모습을 비판하려고만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교사의 말대로 학교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제도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카르페 디엠', 암울하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현실 속에서도 시와 낭만을 통해 현재를 잡을 줄 아는가, 인생을 즐길 줄 아는가다. 중요한 것은 포근한 밤공기에서 낭만과 기분을 느낄 수 있느냐,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을 깨닫느냐다.

세상은 믿음 없는 자들로 넘쳐있기에, 전통과 규율, 딱딱함 밖에 모르는 바보들로 넘쳐있기에 시와 사랑이 더욱 낭만적인 것이 아닐까. 삶을 유지하는 것들,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어쩔 수 없는 바보들이 있기에 나만의 낭만, 나만의 즐김이 빛을 바라고 나만의 시가 한 편 쓰여지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이다. 시인은 지금 죽어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그 가치를 발하고 시 또한 법률, 경제, 기술 등이 세상을 뒤덮고 있기에 더욱 낭만적이다. 물론 모두가 이를 깨닫고 아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쥘 수 있는 사람만이 알 뿐이다.

아침부터 인터넷이 뜨거웠다. 모두들 최대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토요일 밤이 막 지난 때였다. 역시나 인터넷은 전날 밤의 뜨거웠던 집회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촛불집회 등으로 여론이 거세지자 현 정권도 다방면으로 국정쇄신책을 검토중이라는 속보도 끊임없이 보도되었다. 현 정부가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국정쇄신을 추진시킬지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은 들끓는 여론이 촛불집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폭발한 덕분인지 정권이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한 발 물러선다는 것은 어쨋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들은 여전하다. 더 이상 집회가 아니라 시위로 변모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 새벽에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입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삼청동에서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간의 충돌이 큰 이슈가 되었다.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들은 버스로 길을 막고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과정에서 많은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시위대의 사진들과 당시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동영상도 개진되어 있었다. 사진 속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동영상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이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분했다. 아무런 힘 없는 학생들이 무기력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경들을 본 누구라도 왠지 모를 슬픔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무자비한 공권력에 짓밟힌 시위대의 처참함은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회가 시위가 되고, 이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는 것은 분명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왜 촛불집회가 찬사를 받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는 해외로부터도 호응을 얻을 만큼 평화적인 집회다. 촛불문화제라 불릴 만큼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분위기를 즐기고 이어나가는 성격이 강하고, 갖가지 사회 현안에 대해 마음놓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시민들의 축제의 장인 촛불집회가 자꾸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촛불집회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흐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현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촛불집회 자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집회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스럽다. 더불어 촛불집회를 강경 진압하고 해산하려 하는 경찰의 태도에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그것도 한참을 넘어선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평화스러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변질시키려는 불분명한 세력이 있다는 정부와 여당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청와대로 진입하려다 경찰에 의해 강압적인 진압을 당한 시위대들은 정권이 시대를 역행해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려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 속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이 말이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시대를 역행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청와대에 진입하고자 했던 그 시위대가 아닌가 싶다. 이승만 정권에 저항해 경무대 앞까지 들이닥쳐 이승만을 하야시켰던 50여 년 전과는 다르다.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그 당시는 민주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잘못된 정권이었고 지금은 그 후 몇 50여 년에 걸쳐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실현시킨 민주주의 정국이다. 청와대에 진입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급진적인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순수하게 그들 말대로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하더라도 이런식으로 물리력을 이용해 무작정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또래가 힘들게 정착시켜온 민주주의의 법과 질서를 말이다.

청와대 앞에서 자행되었던 경찰의 강경 대응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경찰이 현 정권 최고통치자의 집무실을 시위대가 저항 없이 진입하도록 놔두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경찰은 경찰 나름데로 그들의 의무를 충실이 이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라지만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최소한의 시스템과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평화적이지만 규모있고 열정적인 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의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수정하고 좀더 여론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고, 국회는 시민들을 대변하여 그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정부를 경계한다. 현재 진행 중인 촛불집회가 갖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절대 급진적이고 과격한 변화와 혼돈은 필요치 않다. 현재 국가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절대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과 법, 질서 등을 무시하고 현재의 정국을 감정적이고 폭력적으로만 몰고가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온 아줌마들, 아이를 목에 태운 아저씨들, 부모형제가 걱정되어 나온 중학생부터 대학생들까지. 기존의 시위와 다르게 이번 촛불집회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다양한 계층의 참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문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인터넷상에서의 활발한 참여들은 더 이상 최루탄과 돌멩이로 대변되는 저항과는 색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누가 아닌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긍정적인 참여의 형태다. 도대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촛불집회에 의사를 표현하려 온 순수한 시민들을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공권력과의 충돌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해 더욱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위로의 양상을 꾀할 것이 분명하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응집되는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또 그래야만 지금의 정권과 사람들에게 더욱더 설득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이미 촛불시위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각 언론들은(물론 의도적으로 관심에서 배제시키는 보수 언론들도 존재하지만) 앞다투어 촛불집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단순히 집회의 양상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집회의 특징과 배경,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 등을 원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부도 바짝 긴장해있다.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건, 탄핵 정국 등 굵직굵직한 사건 등이 있었지만 이미 이번 촛불집회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정부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부 운동권의 과격한 행동과 시민들에 대한 선동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촛불집회는 정권과 여당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불순세력데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좀더 효과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을 집회로부터 배제시키지 못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은 어제의 청와대 앞에서와 같이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내몰릴 것이며 정부와 시민의 대립은 더욱더 감정적인 갈등의 양상으로 치다을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축제의 장과 다름없다. 누구한테든 자랑스럽게 찬사받아야 마땅하다.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 등을 보며 이미 우리의 역동적인 시민들의 참여 의식을 실감해 왔던 외국 언론들은 이번에는 촛불집회로 높은 시민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우리의 국민들에게 또 한번 놀라고 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이제 이 집회를 어떻게 끌고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키느냐 역시 시민들에게 달렸다. 보여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시민들이 얼마나 성숙하고 민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그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쥬라기공원>에서 관객들은 난생 처음보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에 감탄했다. 스크린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넘치는 공룡들을 보며 관객들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고 이 영화는 괴수 영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었다. 그 후, <고질라>에서부터 <킹콩>, 우리나라에서는 <괴물>에서 <디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컴퓨터 그래픽(CG)로 무장한 괴수영화들이 연달아 개봉되었고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다.하지만 <클로버필드>는 이런 기존의 괴수영화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다른 괴수영화들보다 유난히 작품성이 높다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나 작품성 등을 떠나서 단지 이 영화는 다른 괴수영화와는 확실히 특이했다. 영화는 철저히 1인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 렌즈의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약 10년 전 <블레어위치>란 영화가 처음 시도했던 캠코더 1인칭 시점 화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인칭 시점 화면과 괴수란 아이템의 절묘한 만남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로스트>,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미드'다. 한 장면, 장면이 긴박한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시나리오 구조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작진이 자주 사용했던 흥미 요소가 바로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등장인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쫓겨다녔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공격자들의 정체를 절대 시청자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적에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의 괴물은 다른 괴수영화와는 달리 철저히 가려졌다. 빌딩에서 빌딩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캠코더의 렌즈 시야에서 벗어나면서 절대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괴물이 어떠한 생김새였는지 확신이 안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의 숨바꼭질은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은 단 몇 초씩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괴물에 대해 일말의 갈증을 느끼고, 때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때문에 꼴딱꼴딱 침을 삼켰다.

등장인물이 캠코더를 들고 폐허가 된 거리를 뛸 때 내는 긴박한 숨소리는 마치 내 숨소리 같았고, 조그마한 괴물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덤빌때는 마치 내가 공격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등장인물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생생함. 이것 또한 1인칭 시점이었기에 가능했다. 괴물이 캠코더를 향해 덤벼들때마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질끈 거려야 했다. 대신 영화 속 인물이 무자비할 정도로 캠코더를 흔들어댄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우리야 스크린 한 쪽에 쓰여진 자막을 읽느라 잠깐씩이라도 눈을 고정시킬 수 있었지만 쉴틈없이 스크린만을 응시해야 했던 미국인들은 우리보다 몇 배 어지러움을 느꼈을텐데 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잘 버텼나 궁금하다.

사실 영화 속 인물 또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일개의 시민이기에 괴물이 나타났을 경우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설정이 가장 사실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괴물과 맞딱드리도록 하기 위해 얼렁뚱땅 사랑을 사용한다. 형을 잃고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숴진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는 설득력없는 설정은 이 영화의 깊은 약점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계속 이끌어가기에 불가피했던 제작자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괴수란 아이템과 1인칭 시점의 절묘한 결합은 이 빈약한 내용 전개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성공의 열쇠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별화다. 괴수영화도 더이상 이런 차별화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나보다. 괴수영화에 한강찬가만큼이나 난데없는 휴머니즘을 결합시킨 영화가 큰 호응을 얻었고, 어제 봤던 영화에서는 캠코더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1인칭 시점으로 등장인물과 관객을 혼연일치시켜버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심형래 감독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실제감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해냈느냐는 더이상 괴수영화의 경쟁력이 아니다. 그저 기본 옵션일 뿐이다. 이제 괴수영화 제작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받으려는 어리석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나아가 컴퓨터 그래픽에 자신의 영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가미시키려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 과연 심 감독이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할 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