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차례 복날이 다가오는 여름철마다 이러한 동물보호단체 등은 개고기를 먹어선 안된다며 한 목소리를 내기 바쁘다. 사진에서와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완견들을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냐며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개를 식용으로 먹는 민족은 찾아볼 수 없다며 개고기를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바득바득 증오하기에 이른다. 개고기 먹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개는 인간을 그 어미아비처럼 믿고 따르며 헌신하고 봉사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으로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다른 동물, 즉 소나 돼지, 닭 등은 합법적인 식용 동물이지만 전 인류적으로 볼 때 개를 식용 동물로 삼는 곳은 없다. 따라서 개를 먹는 것은 지극히 옳지 않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목적으로 동물을 키운다. 앞서 말한 닭, 돼지, 소와 같이 식용을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사진에서와 같이 애완을 목적으로 애완견이나 다른 애완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또한 있다. 여기서 개고기 먹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마다 이렇듯 동물을 키우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개고기와 달리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먹는 개고기는 귀여운 애완견들과 달리 식용으로 키워지는 식용개가 아닌가. 식용으로 키워지는 개랑 식용으로 키워지는 소랑 무엇이 다르다는 소린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어항 속에 여러가지 물고기를 넣고 키운다. 우리가 평상시 사랑이 듬뿍 담긴 물고기 밥을 던져주는 금붕어와 비슷한 과라고 할 수 있는 물고기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식탁에 올려 맛있게 먹는다. 물고기와 개 모두 한 쪽으로는 사랑을 통해 키워지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식용으로 잡혀서 식탁에 올려진다. 그런데 생선을 먹지 말자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문화의 상대성은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러한 문화의 상대성을 접고 생각하더라도, 도대체 개고기를 먹는 행위가 전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들에 반하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채식단체의 논리 또한 묻고 싶은 점이 많다. 인간이 육식을 하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는데 이러한 도살 과정에서 동물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생명을 잃기 때문에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과 달리 식물들은 이러한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열매와 잎을 뜯겨도 금방 재생되어 생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이 먹는 여러가지 과일과 채소들은 아무런 생명의 죽임 없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들일까. 열매와 잎만을 뜯겨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논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특정한 작물의 잎과 열매를 얻기 위해 농부에 손에 수없이 뜯겨진 잡초들은 생명이 아닐까. 생고기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알래스카인들도 그들의 손에서 동물들을 놔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이해. 바로 이것이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개들을 모두 식용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채식주의자들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나도 개고기를 먹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건 채식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건 이들 모두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자신들만의 가치관이 전부인냥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 야만인 취급을 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나 또한 그들을 애써 부정하려는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 되는 수 밖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콤비'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개인의 능력도 물론 수준 이상이지만, 그 개인이 서로 반응하며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 우리는 그들을 콤비라고 이름 붙여준다. 세상에는 유명한 콤비가 많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조던-피펜 콤비, 세계 배드민턴 혼합복식을 독식했었던 김동문-나경민 콤비, 최근 큰 유행이었던 차범근-김성주 축구 해설 콤비 등등. 특히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조직적인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축구에서는 유독 유명한 콤비가 많다. 최근 재결합으로 화두에 오르는 루드-베컴 콤비, 피를로-가투소 콤비, 모리-라울 콤비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콤비를 들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라하-알벨다'콤비를 꼽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은 명장 히딩크 감독의 조련 아래 매 경기마다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히딩크의 말대로 우리나라 대표팀은 경기를 지배할 줄을 알았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우리나라 대표팀이 경고 누적과 부상 등으로 인한 몇몇 핵심 주전의 결장으로 석패했었던 독일과의 경기를 제외하고 가장 고전을 겪었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다. 앞서 말한데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팀들과의 중원 싸움에서 압박을 무기로 절대 밀리지 않은 우리나라였지만 스페인 만큼은 중원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며 매우 고전했다. 바로 스페인의 강력한 미드필더들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는 바라하와 알벨다 콤비가 있었다.


이들은 2000년부터 라리가의 빅3 중 하나인 발렌시아에서 발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에 더불어 스페인 국가 대표팀에서도 똑같은 자리에서 호흡을 같이 했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국가 대표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았고, 02~03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의 강팀들을 뚫고 소속팀 발렌시아가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만약 바라하가 알벨다를 만나지 못했고, 알벨다 또한 바라하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비록 그랬다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평가를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둘 다 유명한 선수들이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과연 나에게는 나만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몇몇 친구의 얼굴이 살며시 떠오른다. 친구를 생각하니 그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더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하는 괜한 후회가 든다. 또한 그 친구는 내가 그 친구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가깝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연락하고 얼굴도 자주보던 친구였지만 각자의 진로로 흩어져버린 후 생각처럼 자주 보고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될 사람은 없을까. 있다면 과연 누굴까. 그런 친구 혹은 형, 동생을 찾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래된 친구의 그리움만큼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쉽지만은 않은가보다.

이 곡은 고등학교때 음악을 좋아하는 한 젊은 선생님께서 만드신 조그마한 관현악단에서 연주했던 곡이다. 선생님께서 매우 젊은 분이셨기 때문에, 클래식 뿐만아니라 영화ost 같은 곡들도 많이 연주했었다.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이 곡을 거기서 연주하게 되어서 기뻐했었던 예전이 기억 난다. 이 곡에서는 자칫 가볍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 곡의 빠른 리듬을 첼로 소리가 비오는 축축한 날의 무거움으로 균형을 잡아주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바이올린의 구슬픈 선율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비오는 날의 개개인의 사연들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하다. 빠른 리듬때문에 서로 박자를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느라 정신없이 연주했었던 기억이 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해 노력했었던 눈빛들. 그 눈빛들을 생각하니 이 곡을 함께 연주했던 친구들과 동생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보고싶어진다.

네이버 블로그는 그만두고, 제대로 블로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