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차가운 돌벽에 상처 같은 구멍들은 무엇일까? 바로 총알 자국이다. 지금도 저 돌벽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처형장에 고스란히 남겨져있다. 그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 그대로 말이다. 벽에 총알이 튀고 피가 얼룩지면서 총살 당했을 수감자들을 생각하면 잔인한 역사에 대한 충격과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마련이다.

폴란드 정부는 총탄 자국이 새겨진 돌벽을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애써 보존하고 전시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조상이 독일 나치에게 당한 그 처참한 현장을 과거 모습 그대로 드러냈다. 전례가 없었던 잔인한 학살을 당한 폴란드인들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치욕스러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 수용소를 개방하였다. 입장료 한 푼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경주가 수학여행지의 1순위로 꼽힌다면, 유태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 1순위는 바로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이곳에 가면 단체로 수용소를 둘러보는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폴란드인들과 유태인들은 왜 후손들에게 이토록 처참했던 공간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서울시가 2020년까지 1400억 원을 들여 남산을 새롭게 가꾸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르네상스'가 어떤 뜻인지 정확히나 알고 이런 명칭을 정했던 것이었을까? 서울시는 뚝딱뚝딱 새로 건물이나 짓고 공원만 보기 좋게 가꾸면 뭐든 '르네상스'가 되는 줄 알았나보다. 일제 통감관저 터, 안기부 본관 등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곳들을 굴착기로 밀어버리려는 그들이 '르네상스'라는 말 속에 '과거의 재생'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

우리는 심한 편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에 대한 편식말이다. 그저 자랑스러웠고 영광스러웠던 기억만을 되뇌이려 한다. 부끄러웠던 순간, 치욕스러웠던 순간들은 애써 잊으려 할 뿐이다. 결국 되풀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였다. 부모들은 아이를 혼내고 다그치지만, 아이들은 혼났던 기억은 잊은 채 제 멋대로의 잘못만 반복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만 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격동의 근현대를 거쳤던 우리만큼 소중한 경험들을 갖고 있는 민족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설령 그 경험과 기억이 치욕스럽고 창피하다고 한들, 그 기억을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드러내고 함께 의미를 다지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선택이 아닐까. 우리가 과거로부터 얻어낼 지혜와 경험은 너무나도 많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되뇌이는 것은 절대 과거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요,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영광스러웠던 과거에서 자부심을 느꼈던 것처럼 수치스러웠던 과거에서 반성과 고민을 느끼는 것 뿐이다. 유태인들이 과연 여태껏 과거에 얽매여있는 탓에,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유태인 수용소를 보존하고 있을까? 이미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에 대한 답은 너무나 뻔해 보인다.

과거 전범국가였다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성숙한 국가로서 주변국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과거에 대한 반성 덕분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주변국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커녕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탓이었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망언을 일삼을 때마다 우리는 발끈하며 일본인들을 호되게 몰아친다. 그런데, 기억하지 싫은 역사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또한 일본인들과 똑같은 부류가 아니던가.

카니발리즘, 우리나라 말로 식인풍습. 수만 년의 인류의 긴 역사에서 식인풍습이 사라지게 된 것은 불과 수 십 년 전의 일이다. 그만큼 식인풍습은 우리 인간들과 멀지 않았다. 오세아니아의 한 부족은 참 애틋한 식인풍습을 갖고 있었다. 그 부족에서는 죽은 가족의 몸과 영혼을 자신의 몸에 영원히 간직한다는 믿음으로 부모형제의 인육을 먹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인풍습 치고는 상당히 애절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인육을 먹는 풍습은 야만적인 악습이라며 당장 이를 그만하라고 강제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낯선 이방인들이 와서 우리에게 죽은 가족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람고기'는 안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들, 다시 말해 '생명존중'이나 '인간에 대한 존엄성' 같은 개념들도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 아닌 이상 결국에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보편적 가치'라는 정체 모를 믿음에 의해 너무나 '인간적'이기만 한 인간의 모습들이 '야만적'인 모습으로 폄하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고기도 안 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하물며 개고기는 왜 안 된다는 것인지 더더욱 이유를 모르겠다. 채식주의자가 일반 사람들에게 육식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꼴과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차라리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주장한다면 일면의 일관성이라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개고기 문화를 반대하면서 드는 일관성 없고 무지한 논리와 생각들이란 참 갈수록 가관이다.

언제부터인가 '반려견'이란 말이 많이 떠돈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이기 때문의 도의적 차원에서 개를 잡아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애완견을 반려동물의 하나로 키우는 사람들도 많지만 동시에 개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다. 조물주가 인간과 개를 반려 동물이라고 짝지어준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를 반려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무슨 동물에 대한 범인간적인 의무라도 되는양 타인에게까지 강요하고 있는 노릇이다. 서로 자신의 범위 내에서 자신이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하는 동물들을 보살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커피전문점에서 에스프레소나 라떼를 마시는 사람이 설탕이 잔뜩 들어간 다방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촌스럽다며 흉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방커피는 촌스러운 취향이니 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커피잔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보면 생태계에서 가장 힘 있는 동물로서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너무나 흔하고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어디 먹기만 하겠는가. 기름도 얻고 가죽도 얻는다. 하지만 이를 어렸을 적 개를 잡던 광경을 목격했던 불편한 기억과 오버랩시켜 유독 개를 잡아먹는 것만이 잔인하고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참 편협한 태도가 아닐까. 그럼 소고기집 주인 아저씨는 인간답고 개고기집 주인 아저씨는 인간답지도 않단 말인가.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가 있다. 고양이 톰은 귀여운 쥐인 제리를 쫓지만 매번 제리에게 골탕을 먹기 일쑤다. 그런데 어느날 톰이 제리를 잡아먹어버렸다고 해서 우리가 톰에게 왜 그런 몹쓸 짓을 했냐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귀엽고 깜찍한 제리라 할지라도 톰이란 고양이 앞에서는 한낱 한 마리의 쥐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물론 마음은 편치 못할 것이다. 그 귀여웠던 제리가 잡아먹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톰에게 제리를 잡아먹지 말라고 강제할 수 있을까. 아니면 톰이 제리 말고 다른 쥐를 잡아먹게 내버려둔다면 마음이 편해질까? 제리와 다른 쥐들은 뭐가 다른데?

폭풍우가 몰아친 덕분에 올해는 좀 잠잠하려나 싶었더니, 역시 또 시끌시끌하다. 해마다 복날이면 거리로 나와 저런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 거의 연례행사 수준이다. 요즘처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말이 많은 때가 또 없었기에 그들의 이런 행위 자체를 내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다. 마치 요즘의 문명시대에는 걸맞지 못하는 야만인 따위로 여기면서 어떻게 반려동물인 개를 먹을 수 있냐며 치를 떤다. 참 독단적인 태도다. 논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논리적으로 개고기 반대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조목조목 따져주는 것도 이제 지겹다.

할 수만 있다면 시위를 하는 사람들 그대로 타임캡슐에 태워서 조선시대 사대문 거리로 보내고 싶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문명국가'의 거리에서, 고지식할 정도로 높은 문화적 식견을 갖고 있었던 양반과 선비들 앞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적 행위!"라고 한 번 외쳐보는 것은 어떨지. 굳이 '문화적 상대주의'니 뭐니 따지지 않더라도 언제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애견문화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고상한' 문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푸아그라라는 요리가 있다. '절망의 진미'라고 불리는 거위 간 요리다. 거위 한 마리 당 손바닥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양이 나오기 때문에 매우 귀한 요리이기도 하다. '절망의 진미'라 불릴 만큼 이 요리를 위해 매년 수많은 거위들이 끔찍하게 희생당한다. 프랑스인들은 최대한 많은 양의 간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거위를 움직이지도 못할 좁은 철창 안에 가둬놓고 깔대기를 통해 엄청난 양의 사료와 물을 먹인다. 이에 거위의 간은 부을대로 부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거위에게 억지로 '지방간'을 앓도록 만들어 거위 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매년 프랑스 주변국들은 프랑스인들의 잔인한 거위 사육을 질타한다. 문화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이런 동물학대가 자행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콧방귀'다. 한 마디로 '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동물학대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두둑한 배짱만큼은 눈 여겨 볼만 하다는 의미이다. 개고기 문화를 국제적 망신이니 후진문화라니 하고 떠드는 이들은 문화 사대주의에 찌들어 나라 밖 눈치를 보느라 바쁜 사람들일 뿐이다. 프랑스가 푸아그라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적 문화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설령 우리의 개고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뿐,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 맬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세상 어느 민족과 비교해봐도 남부럽지 않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를 영위해 나가고 있는 데 말이다.

푸아그라는 프랑스의 대표 요리를 넘어 세계적 별미가 되었다. 누구보다 프랑스인들 스스로가 푸아그라 요리에 자부심을 갖고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만의 음식 문화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먹는 전통이라며 외국인들에게 권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혹자는 축구를 종합예술이라 이야기한다. ‘발레+전쟁+체스=축구’라는 말도 있다.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발레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또 우리나라와 일본, 독일과 폴란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 간 자존심을 내건 경기는 마치 전쟁과도 같다고 해서, 그리고 열한 명이 치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체스를 떠올린다고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관중석 양쪽에서는 대형 국기가 휘날리고, 관중들은 서로에게 야유하고 함성을 지른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잔뜩 상기되어 어깨를 부딪치고 몸을 날려 상대를 막는다. 총성만 없지 전쟁이 따로 없다. 순간 가슴에 태극마크가 박혀있는 유니폼은 참전용사의 군복과 다를 게 없어진다. 한일전이라도 치러지는 날엔 대표 선수들 한 명 한 명은 선수라기보다는 손에 권총이나 도시락 폭탄만을 안 들었다 뿐이지 의사義士에 가깝다. 잉글랜드와 스웨덴의 라이벌전은 가관이다. 축구장에서만큼은 영국신사이고 점잖은 스칸디나비안이고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바이킹의 후예들뿐이다. 서로 욕하고 부르짖으며 자신들이 더 야만스러운 진정한 바이킹의 후예라고 으르렁거릴 뿐이다.

축구에는 지적인 면도 있다. 축구장에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슈트를 입고 경기 내내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턱을 괴고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감독도 있다. 감독들에게 선수들은 체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배치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발레, 전쟁, 체스에다가 ‘드라마’를 추가시키고 싶다. 축구장은 극장이다. 하지만 다른 극들과는 달리 정해진 대본도 결말도 없다. 오로지 선수들과 공만이 라이브로 드라마를 진행시켜나간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관중이 아니라 관객인 셈이다. 때로는 두 시간이 지루하리만큼 재미없고 그저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만, 가끔은 반전영화보다 더 반전을 만들어내며 관객들을 열광시킨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꺾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다. 발레, 전쟁, 체스, 드라마가 합쳐진 종합예술이다.

‘법치주의’ ‘법치국가’...... 법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도 듣지 못했던 말들을 올해 들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 같다. 여름의 촛불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갖가지 시위, 노동운동 할 것 없이 무슨 일만 벌어진다하면 항상 나왔던 이야기가 ‘법과 질서’였다. 우리 사회가 무슨 혼란정국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냥 갑자기 법에 의한 질서가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지는 국가가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다. 국가나 개인의 모든 권리나 의무, 행동 등은 기본적으로 법에 의해 규정된다. 그만큼 법을 존중하는 자세도 굉장히 중요하다. 법을 최우선의 판단 가치로 존중한다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법치주의는 법을 잘 지키라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이건 상식이거든요.” 지난 ‘100분토론‘에서 유시민 전 장관이 했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법치주의에는 국민들이 법을 잘 따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권력자 또한 법에 의거하여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 또한 담겨있다. 하지만 현 정권은 겉으로 법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헌법 등을 무시한 채 임기가 보장되어있는 기관장의 직위를 박탈하는 등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불법적인 시위나 파업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법치주의를 운운하던 정권 스스로가 과연 그만큼 법치주의의 원리를 정확히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뿐이다.

법의 ‘내용’ 자체도 이런 논의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의 법이라 함은 어떤 특정사회의 절대적 이성과도 같은 것이다. 각 국가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각기 조금씩은 다른 법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법이란 모름지기 한 시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이란 자고로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정신을 담고 있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경우 헌법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때론 피를 보면서- 조금씩 때로는 혁명으로 인해 그 내용을 바꾸면서 지금의 내용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제헌절’이란 국경일처럼 1948년 7월 17일, 헌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다. 우리나라에서 헌법은 절대 오랜 기간 끊임없는 국민들의 상호작용과 토론, 역사적 경험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헌법 또는 법질서 그 자체에 대해 절대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단지, 현 정권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헌법이 절대불변의 성질의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무려 60여 년 전 ‘일제히,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의 정신은 현 사회의 가치와 유리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제한적이나마 시민들의 힘으로 개헌을 이루어냈던 87년의 경험처럼 헌법이나 법질서는 시대의 흐름이나 이성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단, 이미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어낸 이상, 그 과정 역시 철저히 법의 질서에 기초하여 진행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엎자는 급진적 사고는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지금의 현 제도권이 마치 법질서와 헌법을 절대불변의 최고의 가치인양 제멋대로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법에 대해 능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법치주의, 법치국가란 말들을 내뱉는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