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 가치를 인정받는 건 편찬 과정과 그 기록물의 관리가 엄정하게 지켜져 왔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국왕이라도 언제나 사관을 대동하고 다녀야 했고 실록은 물론 사초를 열람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했다. 물론 완성된 실록이 수정됐던 적은 있었다. 선조실록과 현종실록이 훗날의 붕당론에 따라 개보수되었는데, 흥미로운 건 실록을 수정했던 집권당이 본래의 실록 원본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조와 현종은 실록이 원본과 수정본 두 종류로 되어있다. 일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실록 수정이라는 어마무시한 일마저 서슴치 않았던 이들이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기록을 병존시켰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 꼬장꼬장했던 사대부들에게도 역사의 기록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란 성리학적 도그마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 축구의 미래는 밝지 않다. 히딩크 세대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 끊임없이 내리막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는 아시아 팀들을 상대하면서도 점유를 포기하고 실리축구를 하는 팀이 되어버렸다.  이란이나 일본을 상대한 것도 아닌데도. 2002년 이후 투자도 활성화되고 유소년 시스템이나 인프라 같은 저변도 좋아지면서 많은 기대가 있었지만 정작 그 효과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중동리그(요즘엔 중국리그도 매한가지)에 있다. 과거에는 J리그 클럽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근에는 중동 클럽들이 오일머니를 앞세워 국내 실력파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거액의 이적료를 받는 K리그 클럽들은 물론이고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의 입장에서도 중동행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중동리그가 선수 기량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중동은 전체적인 리그 수준도 낮은 편이고 리그 내의 격차도 크다. 팀별 전력차이도 많이 나고 용병과 자국 선수들의 수준차도 크다. 석유재벌 구단주 덕분에 영입된 한물 간 용병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사실 그 용병들도 열심히 뛰진 않는다. 커리어를 위해 중동에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동에 가는 건 단지 선수 황혼기에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리그에서 무슨 기량 향상이 있겠는가.

축구는 수준급 선수 한두 명 있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우리팀도 기성용, 손흥민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선수들과 그들을 받쳐주는 선수들과의 수준 차이가 컸다. 특히 중동리그 출신들은 오히려 기량이 뒤로 가버린 느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동이나 중국은 K리그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는 리그다. 한 마디로 국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돈 때문에 더 낮은 급의 리그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기량이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금전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유럽이나 남미 레벨의 수준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대표팀을 봤을 땐 안타까운 일이다.

홍명보가 박주영을 기용하면 인맥이고, 슈틸리케가 이정협을 기용하면 안목인가. 어떤 선수를 선택하느냐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고, 우리는 그 '선택'이 아닌 선택의 '결과'를 두고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선수 기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순간 그만큼 감독의 선택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감독의 선수 기용 권한이 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정협 같은 무명선수가 깜짝 발탁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홍명보와 슈틸리케는 똑같이 본인의 관점에 따라 선수를 선발하고 팀을 만들었다. 다만 홍명보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슈틸리케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감독마다 선호하는 선수를 기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허정무가 이근호를, 조광래가 지동원을, 최강희가 이동국을 아꼈던 걸 그저 인맥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올림픽 메달 감독을 한순간 파렴치한 연고주의자로 만들어버린 건, 뜬금 없이 인맥이란 자극적 워딩을 갖다붙인 기자들도 한몫을 했을테고 그에 놀아나는 냄비근성들도 한몫을 했을테고.

영화에는 여운이 있다. 괜찮은 영화일수록 진한 잔향이 남는다. 속으로 되뇌어도 보고, 어떤 부분을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젖어있기도 하고.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극장과 쇼핑몰, 식당, 마트가 한곳에 어우러져 있는 복합문화공간(멀티플렉스 하나 끼어있다는 게 문화공간이라 불릴만 한지는 모르겠지만)이란 데에선 그것을 느끼기 힘들다. 영화가 끝난 뒤 출구를 나서면 곧바로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소비공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사람들에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심어줬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외적 성장은 앞당겨졌을지 몰라도 사회 정의는 그보다 몇 곱절 퇴보하고 말았다. 정석이 꼼수를 이긴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고, 편법을 모르면 둔하다는 소릴 듣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니 가진 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꼼수와 편법 없이는 부의 축적이 어려운 사회에서 재벌이 되고 갑의 위치에 올랐다는 건 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