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의 열렬한 팬이자 애청자였다. 별밤을 청취하던 세대는 아니지만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를 꼭 챙겨 듣곤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는데, 그는 문자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들에게 문자의 끄트머리에 꼭 본인의 이름을 적어줄 것을 부탁했다. 사연을 소개할 때 '1234님' 같이 전화번호 뒷자리 호칭보다 보내준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숫자로 청취자를 호명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진 지 오래지만 숫자에 '님'을 붙여 사람처럼 부르는 건 언제 들어도 늘 어색하다.

월드컵을 2년여 앞둔 2000년,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감독으로 히딩크를 모셔오는데 성공한다. '우리 대표팀도 이제 유럽처럼 수준 높은 축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우리는 유수의 명문 클럽을 거친 그에게 선진 축구 전술을 전수받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히딩크의 이야기는 달랐다. 한국팀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체력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모두 의아했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팀이 다른 강팀에 비해 기술이 부족한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딩크를 모셔와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려 했거늘 정작 그가 하고 싶어하는 건 체력 훈련이라니. 체력을 우선시하는 그의 훈련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축구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시 말해 입만 아플 뿐.

바르셀로나가 한때 무적의 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체력 덕분이었다. 대부분 바르셀로나를 기술이 좋은 팀으로만 알고 있지만 바르셀로나는 그 어느 클럽보다 많이 뛰는 팀이다. 멀뚱히 제자리에서 패스를 주고 받는다고 티키타카가 되진 않는다. 선수들이 계속해서 공을 받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티키타카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공을 뺏기면 바로 압박을 위해 달려들고 공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바르셀로나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선수들의 활동량 저하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께서는 당부하셨습니다." "잠시 후 장관님께서 브리핑하시겠습니다."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어투들.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에 대해 극존칭을 쓰거나 다른 관료들이 직속 상관에 대해 높임말을 사용하는 건 이미 관행처럼 굳어진 듯 하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높임법을 쓰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브리핑·기자회견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그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구어체라도 객체높임법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지금이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는 시대도 아니고 이런 높임말이 나올 때마다 거북함을 느낀다. 더 문제인 건 이를 문제삼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 이미 체내화되고 익숙해진 걸까. 아마 공식적인 방송에서도 극존칭을 남발하는 곳은 북한과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건 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행복하고 즐겁기 위한 활동을 즐기는 것, 인간을 호모 루덴스로 지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놀이라는 건 인간적인 삶 그 자체고 인류 문명은 놀이를 떠난 적이 없었다. 오늘날의 인터넷게임이란 것도 이런 놀이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말해 인터넷게임은 디지털화된 놀이에 지나지 않다. 바둑과 바둑게임이 다른 건 바둑돌과 바둑판 대신 모니터를 사용한다는 점뿐이다. 다른 인터넷게임들도 마찬가지다. 가상공간이라는 무제한적인 확장성과 편의성이 가미되었을 뿐 장난감 총칼을 휘둘렀던 옛 시절의 전쟁놀이와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한국 부모들의 맹목적인 학구열과 생산성·근면함에 대한 집단적인 강박관념은 인터넷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포비아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그것이 입신양명만을 바라는 구시대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압축된 산업화 과정의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는 걸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규범화된 삶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이 작동한 결과다. 아직까지도 이 나라의 교육관은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을 하게끔 잘 훈육된 선량한 노동주체를 만드는 데 그치고 있음이 드러난 것. 아무리 고지식한 법관들이라지만 2:7이란 스코어는 너무 하지 않나.

"중국인, 운전면허 목적 한국행 러시", 규제 완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운전면허 간소화로 면허를 따기 위한 개인의 시간과 비용은 대폭 줄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만큼 도로에는 자질이 부족한 운전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자동차는 어떻게 운행하느냐에 따라 심하게는 인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단 하루만에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는 게 현행 운전면허제도다. 특히 최악의 수준인 국내 도로사정이나 사고발생율을 감안한다면 다른 나라보다 더 까다로운 교육 절차로 운영되는 게 맞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면허 간소화는 사적 비용 대신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절대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면허 발급 기준을 대폭 상향시키고 강습 기간도 늘려서 사고를 유발시키지 않음은 물론 어느 정도 방어운전까지도 가능한 이들만 차를 끌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어쨌든 매우 우려스럽다.

[1] 일제는 조선의 정치를 당쟁의 역사로 규정했다. 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에서 파쟁적인 민족성이 형성되었고, 이 선천적인 파쟁성 때문에 정치적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등장한 사회적 모순들은 당파싸움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격이라 할 수 있는 소수의 권력 독점에서 연유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다. 열강이 침략하기 전 19세기의 조선은 소수 가문의 세도정치로 극심한 부패와 부조리를 겪고 있었고, 그 세도정치를 유발시킨 건 당쟁이 아니라 강력한 중앙권력의 변질이었으니까. 정조가 대왕이란 칭송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도정치의 원흉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런 견제책이 없었던 중앙권력이 소수의 위정자에게 넘어갔을 때 이미 조선의 운명은 다한 셈이었다.

[2] 최근 들어 남남갈등이 걱정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남북갈등에 대비되는 남한의 내부적 갈등·분열을 가리키는 말인데, 외부의 적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내부의 이견, 대립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병폐로 여기는 듯한 늬앙스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사실 갈등이 존재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주변과 중심, 진보와 보수, 남녀, 세대 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한국이라고 해서 유난히 갈등의 골이 깊은 것도 아니다(적어도 인종, 민족, 종교적인 갈등은 없다). 혹자는 국회의원들을 보고 싸움질이나 하는 족속들이라며 조소하지만 원래 의회란 싸우고 투쟁하는 곳이 맞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원내로 수렴해서 조정하는 게 의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회가 대립과 견제 없이 사이좋게 한 목소리를 낸다면, 바로 그건 공산당 대의원 대회와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래서 양당제 혹은 다당제가 운용되는 것이고 대립, 갈등, 견제가 현대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남갈등이란 희한한 수사로 내부의 갈등을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건 그만큼 취약한 자기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외부의 위협을 부각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남파 간첩들이 남남갈등을 조장한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입밖에 낼 수 있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서, 사회 내에 남남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다같이 한 목소리만 낸다고 하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김정은이나 박근혜나 다를 게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