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의원이 국회 의원정수를 늘리고 세비를 줄이자는 발언을 했다. 역시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의원 숫자를 줄여도 모자랄 판에 늘리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원내 비주류의 소신발언이 기득권의 밥그릇 키우기가 되었던 걸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토크빌의 말은 역시 정설이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막연한 반감, 혐오감을 갖고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런 악감정이 그저 배설적인 비난에만 머물러 있을 뿐 유의미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의원정수 논쟁이다.

많은 이들은 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들에게 투입되는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마치 가게 사장이 돈을 아끼기 위해 점원을 고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장은 당장 몇 푼 아낄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을지 몰라도 부족한 점원 수 만큼 가게 서비스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불친절한 서비스 때문에 가게 손님은 줄어들 것이고 매출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원 위임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투입되는 세비 몇 푼 아끼려다 자칫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의원 숫자가 줄어들수록 대표성이 떨어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의원 1인당 국정감사 혹은 예산심사의 범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행정부 견제가 제대로 이뤄질리 없고, 부정부패가 판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국회의원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나 권력의 편중이 문제라면, 상식적으로도 의원 숫자를 늘려 그 힘과 권위를 쪼개야 함이 맞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과 임금격차해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자영업자들의 부담은 늘어나겠지만, 그들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자영업 인구는 이미 (포화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과잉 유입되어 있다. 제한된 내수시장에서, 그것도 숙박음식점업 같은 뻔한 업종으로만 집적되다보니 수익률이 떨어지고 가계 형편이 악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된 자영업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구조조정이 있어야 하며, 최저임금 인상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유인책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영업을 위해 임금 인상을 보류해야 한다는 건 "다같이 살자"가 아니라 "다같이 못살자"라고 외치는 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경환 부총리 입에서 최저임금 인상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내수시장 침체가 정말 심각하긴 한가 보다. 쌍끌이 어망으로 치어까지 신나게 쓸어담다가 뒤늦게 물고기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격. 물론 대기업 같은 어부들은 이미 자기들의 배를 실컷 채운 뒤의 일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치어를 방생하는 것과 같다.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인 셈.

서울에는 오스망이나 나폴레옹3세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오스망의 파리 정비도 갖가지 비판들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의 흉측한 난개발보단 백배 천배 낫다. 이곳에서도 도시를 근대적으로 재정비할 수 있었던 골든 타임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미적감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군인 출신의 독재자가 정권을 잡은 탓에 서울의 정체성, 역사성, 장소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서울의 특성을 결정짓는 건 오로지 돈이 되었고, 자본 논리에 따라 헐리고 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잿빛 콘크리트 건물만 수두룩해졌다.

하루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집에 가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기에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엘레베이터도 혼자 탔다. 괜시리 기분도 좋았던 밤이기도 했고 마침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엘레베이터 거울을 보며 춤을 췄다. 홀로 있을 때만 가능한 말도 안되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차 싶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얼마 전부터 엘레베이터 내부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사실 누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비실에 아무도 없었을 수도 있고 누가 있었다 해도 모니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는지 안 보고 있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 스스로 굉장한 창피함을 느꼈다는 점, 그리고 그 후로는 홀로 엘레베이터에 있을 때에도 옆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얌전빼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본인이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그깟 카메라 몇 대를 왜 꺼려해야 하냐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감시카메라는 범법자를 색출하는 것처럼 특정한 순간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일상적 감시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푸코가 말하는 판옵티콘처럼, 감시카메라가 켜져 있든 꺼져 있든 그것이 날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본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검열을 하는 거다. 감시란 그런 거다.

무슨 일만 터지면 CCTV부터 찾는 게 이 사회다. 해외에선 감시사회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 분전하고 있는 마당에 이곳 사람들은 본인의 터전을 감시사회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있다. 안전, 보안, 치안 등 감시카메라를 설치함으로써 얻게 되는 가시적인 장점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할 가치들이 너무 많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덜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그리고 당장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